<본문>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8:1-5)
<설교>
앞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 저자는 이제 8-10장에서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우월하신 사역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율법으로 세워진 레위 계통의 제사장 사역에 비해,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에게 가져온 혜택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저자가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레위 계통의 한시적 제사장이 아닌 멜기세덱 계통의 영원한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께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계신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제사장이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니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것, 이 모두는 지금 우리들과 연관된 그리스도의 일하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지금 신자로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우리는 그분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사장 직을 완성하셨고 따라서 그 직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자가 되셔서 하나님 간구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간구하심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뒤에도 신자는 여전히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예수님을 마치 신자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감시하는 역할만을 하시는 분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신앙생활은 내가 힘을 내서 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나의 잘함에 대해 칭찬하시고 그 대가로 복을 주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여기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영원한 제사장의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제사장이시라는 것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사실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저자는 2절에서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는 말로서 밝히고 있습니다. ‘부리는 자’란 사역하는 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서 여전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장막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함으로써 사람이 세운 땅의 것은 이미 그 역할이 끝났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늘의 성소에서 여전히 제사장으로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가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즉 땅에 있는 우리들의 종교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유지하게 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면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은 땅에 세워진 성막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땅에 세워진 성막에서 제사장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다 알고 있는데 왜 굳이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분으로서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로 일하셨다는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보이는 성전에서 보이는 제사제도에 더 믿음을 두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저자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심을 언급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의 제사 행위에 유혹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하늘의 것을 암시하고 보여주는 모형이며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가 나타났다면 모형과 그림자는 가려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셔서 지으라 하신 성막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형이며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의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형이 아닌 실제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실제이신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이 섬기는 땅의 것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것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모형이며 그림자일 뿐입니다. 제사도 안식일도 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모형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모형과 그림자를 붙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대 교회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신앙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막연히 바라보는 것보다는 지금 눈에 보이고, 실제 몸에 와 닿는 모형과 그림자가 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장, 하늘 보좌, 예수님의 간구하심, 이 모두는 비록 말은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보다는 내가 직접 실천하는 십일조를 바라보는 것이 더 확실하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주일을 지키는 내 자신이 더 확실하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 비신앙적 모습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여러분에게 생생한 실제적인 사건으로 남아야 합니다.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하늘 성소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 믿음을 구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종교적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며 그분의 행하신 일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신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분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모형과 그림자에 머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피흘리신 사건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