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히브리서 8:6-13 새 언약

<본문>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브리서 8:6-13)

<설교>

히브리서는 구약의 내용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구약의 것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위해 쓴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는 것 보다 눈에 보이는 구약의 의식적인 것들을 행하는 것이 더 분명한 신앙이 아닌가 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의식들과 종교적인 행위들이 없을 때 행위가 있는 사람들에 비해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는 착각과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행위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는 행위가 있어야 신앙이 분명하고 확실해 진다는 생각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런 우리들을 향해 기록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구약으로는 안 되고 예수님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제사장 얘기는, 믿어야 할 분은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지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레위계통의 제사장은 자신의 죄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로도, 절기로도 ,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도 안 된다는 것, 오직 예수님으로만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구약 이야기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것을, 하늘의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모형과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서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기다리기 위함이지 그것을 신뢰하고 믿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이야기에서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언약에 대해 언급합니다. 언약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제사장에 대한 내용과 동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두 계통의 제사장이 등장하는 것처럼 언약에도 두 언약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둘을 등장시켜서 ‘이것으로는 안되고 이것으로만 된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6절부터 보면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첫 언약을 말하고 둘째 언약을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 언약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첫 언약이 무흠하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무슨 뜻입니까? 둘째 언약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첫 언약은 옛 언약이라고도 하고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둘째 언약은 새 언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워진 새로운 법을 뜻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법이라는 의미는 내용의 새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를 말함을 아셔야 합니다.

창 17:7절에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약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언약의 성취 조건으로 아브라함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 4:13절에서도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켰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다는 언약 아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첫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첫 언약 아래 모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새 언약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인용된 예레미야 31:31-33절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법이 이스라엘의 밖에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의 속, 즉 그 마음에 기록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으로 새롭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둘째 언약입니다.

즉 첫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였지만, 둘째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살아계셔서 그들을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확실성입니다.

그러면 이왕 실패할 첫 언약은 무엇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실패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온전케 되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윤리, 도덕 수준의 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을 앞세워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나, 행함을 신앙 그자체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둘째 언약 아래 있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은 무엇을 근거로 합니까? 여러분의 행함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의 행위입니까? 우리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라 해도 무익한 것일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무익한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주님의 일을 믿는 믿음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는데요 그래도 열심히 기도하고 주일도 잘 지켜야 그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라는 말은 해서는 안 될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그 믿음을 진짜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믿음만으로는 믿을 수 없고, 보이는 행함이 있어야 믿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분은 못믿는다는 불신앙일 뿐이지요.

믿음은 ‘무엇을 행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를 묻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구원받음을 믿습니다’는 것으로 이미 그의 믿음은 확인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믿는 자의 열심과 행함이 개입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허전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천과 노력과 행함으로 신앙을 가득 채우다가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자를 때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허전함으로 그리스도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안되고 예수님으로만 되어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