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히브리서 9:1-10 신앙의 개혁

<본문>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브리서 9:1-10)

<설교>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고, 종교계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도 개혁이라는 말은 아주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지금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꾼다는 의미가 어떤 제도나 의식 등에 통용됨으로 말미암아 개혁을 제도나 의식을 버리거나 새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개혁 한다’는 말을 할 때도 그 의미는 교회에 전해지고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의식 등을 바꾸고 새롭게 하자는 의미가 강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가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은 옛 관습이나 의식을 버리거나 새롭게 하면 참된 교회가 되고, 참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혁하자는 사람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은, 현재 난무하고 있는 담임 목사의 권세에 대한 변화입니다. 목사가 성도들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에 대한 강요를 하지 않는 것, 교회가 재정의 절반을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 등등 사회가 볼 때 정의롭다고 여길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들이 타당한 것이고, 또한 교회가 그렇게 달라져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참된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제도와 의식과 생각이 달라진 것뿐이고, 달라진 의식과 생각에 의해 다른 형태의 교회가 세워진 것일 뿐입니다. 이점을 생각하지 못하면 항상 참된 교회상을 보편적인 타 교회와의 제도와 의식의 차이에서 찾으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신앙의 개혁은 무엇일까요? 신자에게는 어떤 개혁이 필요할까요?

9-10절을 보면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개혁이라는 말의 의미를 통해 신자에게 있어야 할 개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까?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의 성막과 성막에서 행해지던 제사 예법에 대한 것입니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비석들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를 언약궤에 넣어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만나를 통해서는 떡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법에 순종치 않음을 고발하고, 싹난 지팡이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 일하고 계심을 보지 못하고 모세만을 봄으로서 ‘우리도 너보다 못하지 않다’는 교만을 고발하고, 언약의 비석들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섬기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가 제물의 희생의 피로 깨끗케 되어짐을 제사와 제물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궤에 피가 뿌려지는 지성소는 휘장으로 성소와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도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은 것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7-8절을 보면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둘째 장막은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피를 뿌리는 지성소에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번 들어오도록 허락된 것은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거룩한 자만 들어갈 수가 있는데 그 누구도 거룩한 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길이 나타나지 아니했기에 하나님이 명하신 예법을 따라 제사를 드리면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막의 예법으로는 성도를 온전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씻는 예법은 육체의 예법으로써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일 뿐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한 개혁할 때란 언제를 의미합니까? 바로 길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때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길이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더 이상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길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개혁은 육체의 예법을 따르던 것이 이제는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육체의 예법을 중시하고 육체의 예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분명 개혁되지 못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개혁은 육체의 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고 길이 되시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 믿고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제도와 의식을 바꾸고 버린다고 해서 참된 개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혁된 신자는 육체의 행함을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았음을 믿을 뿐이고, 그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고 내 마음이 주님에게로 더욱 깊어진다면 하나님이 나를 어떤 삶으로 인도하시든 감사와 기쁨을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생각이 개혁된 신앙인의 생각인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개혁의 의미조차도 교회의 유익과 발전에 두고 있기도 합니다. 기존의 교회와 다른 제도, 다른 모습을 갖춤으로써 기존 교회에 식상한 사람들을 끌어 모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을 빙자해서 교회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개혁은 나를 향한 관심에서, 교회를 향한 관심에서 주님에게로 돌아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신앙인을 이렇게 개혁시키시는 것입니다.

육체를 바라보는 자는 개혁되지 못한 자입니다. 여전히 육체의 예법에 매어 있는 자입니다. 길이 나타났음을 보지를 못합니다. 길을 걷는다고 하지만 바른 길을 걸어가지 못합니다.

구약에는 성소의 예법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따라서 길이 되신 예수님을 보지를 않고 여전히 육체의 예법에 매어 자신의 행함을 보며 사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예법을 따른 것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준되어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거하는 성도들을 향한 복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값없이 영원한 복에 거하게 되었음을 바라보며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개혁된 신앙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