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브리서 9:11-15)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들어 갈 수 있지만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일 년 한차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날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성소가 이스라엘에게 금지 된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막고 계심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도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자신의 몸에 피를 발라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것은 다만 피로써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재미없고 딱딱한 구약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구약의 내용을 덮어 버린 채 예수님을 말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한 많은 잘못됨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믿음의 본질을 찾게 해줍니다. 가령 지성소의 규례가 말해주는 것은 인간은 무엇으로도 하나님께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길로써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말 그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으로만 되어 진다는 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오인을 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착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의 결과이고, 이러한 무지는 구약에 관심이 멀어져 있고, 아예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예수님을 말함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살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을 앞세우기 보다는말씀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말한 성소는 구약의 성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어 들어가신 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그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시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예배당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온전한 장막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손으로 지은 장막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에 모든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장막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들의 손으로 지은 예배당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나라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내 손으로 예배당 하나 지어 바치는 것을 더 큰 소망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겠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깨끗함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만 거룩함을 입은 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의 의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의가 나를 살렸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이 큰 자랑거리로 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행한 것을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자신이 행한 것을 바라보며 만족해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입술은 예수님을 향해 있으나 그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천리만리 멀어져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전혀 보지를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가를 물을 뿐입니다. 우리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모두 쓸모없는 쓰레기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가 우리를 붙들고 있고 감싸고 있는데 무엇을 들고 하나님께 나가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서 보시는 것은 ‘예수 믿고 뭘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이 있으면 뭔가 행해야 하지 않느냐?’는 인간들의 종교 공식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짐을 진 채 행함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면서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의 기쁨과 감사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손으로 무엇을 지었고 무엇을 했는가를 보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믿고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에 부족함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은 이미 충만해져 있습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말입니다.
15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언약의 내용이 아니라 성취에 있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이 인간에게 성취를 요구한다면 새 언약은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신 것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만을 높이고 자랑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신자답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신자다움은 우리의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안다면, 그 앎이 그 사람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그 앎이 묻어나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엇이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씀을 통해 다시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