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히브리서 9:16-22 언약의 피

<본문>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16-22)

<설교>

대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가 외치고 있는 내용이라고 믿기에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것이 곧 십자가를 믿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은 분명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십자가를 생각한다고 해서 모두 신자라 할 수 없고 구원받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믿게 되는데 있어서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그것을 해결함으로 십자가를 믿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즉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그만큼 여러 가지의 문제를 안겨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에게 요구한 것은 내가 뜻하고 있고, 목표하고 있고, 소원하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로서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나의 포부와 욕심을 포기하지 않은 채 십자가를 외치는 것은 거짓임을 깨닫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한때 나에게는 크나큰 고민거리였던 것이고 지금도 때때로 나에게 고민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주 쉽게 받아들이고 믿는 있는 분들을 보면 의아스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고, 저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기에 이리 차이가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내려지는 결론은 ‘걸림이 될 만한 부분을 모두 빼 버린 십자가이기에 그렇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나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너는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네가 바로 형벌을 받고 죽어야 할 존재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 외침을 듣지 않습니다. 단지 ‘구원’이라는 외침만 들으려고 함으로써 자신의 악함은 외면한 채 십자가만 말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는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외치는 예수님의 피의 소리를 들음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의 소리를 듣지 못함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무작정 ‘믿자 믿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맹목적이 믿음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주님의 외침을 들으며 믿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나는 예수 믿고 있다’라는 답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나는 상관없음’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신자는 항상 자신이 믿음 없는 존재임을 길이 자각하고 주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피’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는 마치 통달한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주의 깊게 생각하고 묵상해야할 문제가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에 대해 잘 알고 통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피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피를 말하면서도 피가 중심이 아니며 관심 또한 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8-22절을 다시 보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사세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말한 후에 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 이 의미를 깨닫는 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4:7절을 보면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준행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모세는 어떻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말씀을 들을 교인들이 말씀에 감동이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열심히 지켜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교인들의 반응에 감동하면서 무척 고무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 말씀에 은혜를 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진정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피를 뿌린 것입니다. 언약서에 피를 뿌린 것은 없지만 본문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모세가 행한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모세처럼 피를 뿌리는 것이 될까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피를 뿌린 것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이유가 없이 피만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말씀을 낭독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피로써 죄사함을 얻었으니 죄사함을 받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은 자답게 살게 하기 위해 내려진 하나의 생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피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에서 자기 구원만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피는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단순히 ‘너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는 죽은 자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책에도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죽은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은 이스라엘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취하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언약을 기어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약의 피 앞에서 우리의 실천 의지를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실천 의지까지 몽땅 무너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살았을 때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 채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는 그 효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왕성한 활동과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러한 우리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선포하게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외치는 것이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