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 히브리서 9:23-28 죄를 없게 하심

<본문>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브리서 9:23-28)

<설교>

28절의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바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신앙은 당연히 예수님의 죽으심이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죽으심이 없기에 십자가와는 당연히 상관이 없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단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만을 바라보는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신뢰한다면 그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 기적에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이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도외시해서는 안됩니다. 소홀히 여겨서도 안되고 잘 아는 내용이라 하여 가볍게 지나가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철저히 우리의 문제를 파헤쳐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 물음에 대해 쉽게 ‘나의 죄 때문에’라는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또 다시 ‘죄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떤 상태에 처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간이 어떻게 되어진 것인가? 등등 쉴 새 없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너무 잘 알고 있다며 가볍게 지나가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즉 가벼운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오심으로 단절이 화목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과 은혜안에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떤 자리에 와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고 피의 은혜를 알게 된 신자의 자리가 어떤 것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교회 다니는 것을 전부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신앙을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 밖에 안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있게 된 자리는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리인데 이 은혜가 길을 가다가 걸인에게 동전 하나 던져주듯이 아무렇게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주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런 은혜가 허락되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있는 신자는 자신의 의로움이나 행함을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예수님만을 구주라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자리입니다.

26절을 보면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끝에 나타나신 이유는 자신을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제사로 드리는 것, 즉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님으로 인해서 나의 죄가 없게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즉 죄를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를 보이고 행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게 되었다는 것은 심판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피해 보기 위해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큰 복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죽음은 죄 값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쨌든 인간이 한번 죽음으로 죄 값을 치렀기 때문에 심판과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어도 내가 죽는 것으로 죄 값을 치르는 셈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값으로 인한 죽음은 단순한 육신의 사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구약의 제사가 죄 값을 대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 값으로 대신 죽으심을 보여주는 모형이었을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으로서 죄 값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자신의 행함과 의를 가지고 죄를 없이 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뿐입니다.

죄 없는 자는 심판과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바로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심판과 상관이 없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세상을 끝내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주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 안에서 믿는 자로 항상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늘의 생명과 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 모든 소망을 두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한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음으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내는 나의 참을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 사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가진 자로서, 예수님을 알게 된 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많이 갖게 합니다. 신앙은 교회를 출입하고 교회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가 없게 된 것을 아는 신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복된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성을 안다면 복된 존재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세상에서 복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누리고 있는 풍성한 복을 내어 놓으며 살 뿐입니다. 세상이 소망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고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사나 죽으나 주님만을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날 위해 죽으신 그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따라서 신자로서 게으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소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충실해야 하는 것은 죄가 없는 자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세상에 이러한 복을 마음껏 증거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