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 히브리서 10:5-9 한 몸을 예비하심

<본문>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브리서 10:5-9)

<설교>

신자가 성경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성경에서 말씀되어지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그분께서 말씀하신 현장인 성경에 대해서 자신의 뜻과 욕망과 이익을 따라 제멋대로 가감을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모습이며 결국 그가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는 모든 것은 단지 언어에 그치는 것일 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정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나의 신앙을 인정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점검은 오직 성경으로 말미암아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되어지는 참된 신앙,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 어떤 모습이 보이는가를 살피면서 자신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을 분별함에 있어서 보게 되는 것이 자신의 굳은 의지 아니면 자기 행위입니다. 신앙으로 여기는 행위가 있고, 신앙으로 여기는 내용에 대해 굳게 지키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있다고 여길 때 그것으로 ‘나는 신앙 있음’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가령 ‘신자는 주일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고, 또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러한 생각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신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그의 눈에는 주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신앙이 없는 것으로 분별되어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주일을 지키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말씀하지를 않습니다. 결국 성경이 기준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면서 습득하게 된 지식과 전통에 자신도 모르게 세뇌되어짐으로 오직 그것만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이 옳고 그름에 대한 자기만의 분별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을 이해할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틀에 맞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많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의 생각의 틀림을 지적한다면 무작정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성경을 다시 살피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하는 신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아니다’고 할 수 있어야 하고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사 내가 수십 년 동안 옳다고 믿어왔고 또 그렇게 실천해 온 사항이라 할지라도 성경이 아니라고 말씀한다면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성경보다는 수십 년 믿어온 자신의 지식을 신뢰하고 의지해 버리는 것을 보면서 답답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5절을 보면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의 머리에 박혀 있는 하나님은 이런 신이 아닐 것입니다. 제사와 예물을 한없이 원하고 번제와 속죄제를 열심히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그런 신으로 박혀 있다고 봐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현대 교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예배이고 헌금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경건하고 거룩히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정성으로 바치는 헌금을 원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는 신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에서 말씀되어지는 하나님과는 상반된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어느 쪽을 버려야 할까요?

인간의 종교성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은 분명 제사와 예물을 원합니다. 인간이 신에게 보일 수 있는 정성의 행위는 제사와 예물, 그리고 기원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조건 열심히 바치고 열심히 나오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말씀되어진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으시고 번제, 속죄제도 기뻐하지 않는 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참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혹시 본문에 언급되어진 제사와 예물, 번제와 속죄제에 대한 부분을 구약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은 없겠지요. 즉 신약에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니까 본문의 말씀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뚱맞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하나님은 예배와 헌금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과도 같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시렵니까?

먼저 ‘원치 않으시고’라는 말을 제사를 행하지 말고 예물을 가져오지 말라는 뜻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책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했지만, 때문에 제사를 행하지 말고 예물도 바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어떤 의도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시고 내가 바치는 예물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혹 교회의 중심을 흔드는 말로 들려질 수 있겠지만, 제가 볼 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했듯이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예배라는 해위 자체를 의로운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지요. 예배라는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예배라는 행위가 아니라 예배를 위해 모이는 우리의 속마음입니다. 과연 우리의 속에 무엇을 두고 모이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의 의미는 제사라는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하면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용서됨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제사의 목적은 의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과 의미도 동일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우리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알면서 형제를 만나는 그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행위에 변화를 주어서 예배를 좀 더 거룩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발상은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지 않는 무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합니다. 상한 심령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이해합니다. 즉 하나님은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그 마음을 원하시고 그것을 제사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으시고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이 말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사는 의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평생토록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제사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몸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몸에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첫 것은 제사와 예물을 뜻하고 둘째 것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이것을 보면 폐하여 진 것은 무엇이고 굳게 세워진 것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또 다시 율법을 기웃거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율법에 충실한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성어린 예배와 헌금이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그 속셈은 그리스도보다는 자신을 굳게 세우기를 원할 뿐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면서 원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헌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근거 삼아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속셈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제사로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몸에 관심을 두고 기뻐하겠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고 그 모든 죄가 용서 받은 것으로 기뻐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죄사함의 기쁨과 축복이 세상에서 돈 벌고 성공하는 것보다 더 크고 즐겁고 복되다는 것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몸으로 인해 베풀어진 은혜의 기쁨과 복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는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