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0:15-18)
<설교>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부인하고 대신 믿음이 이끄는 길로 들어서라고 요구합니다. 이로 인해서 때로 믿음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가지고 태어난 내 본성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항상 옛 본성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옛 본성은 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예수님을 향하여 살아가도록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이 힘이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처럼 옛 본성과의 충돌 속에서 갈등하는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는 과거사가 아닙니다. 지금 현재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지금 내가 은혜로 말미암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신자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가 어떤 일을 겪는다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겪는 일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기분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신자로서 은혜를 입었다면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신자는 어떤 일에서도 낙심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면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죄와 불법이 우리의 본질이었습니다. 죄와 불법의 결과는 영원한 멸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죄와 불법을 하나님은 다시 기억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은혜의 가치는 실로 엄청납니다. 세상의 무엇으로 죄와 불법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세상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루하루 사형집행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형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형수에게는 하루하루가 연장된 삶이고 덤으로 주어진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루가 참으로 귀한 날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사형수의 심정으로 산다면, 하루하루가 하나님께 덤으로 베푼 은혜의 시간으로 여기며 산다면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숨을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혜를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절박한 심정들이 자취를 감추고 없는 것입니다.
오늘이 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기에 하루에 대한 고마움을 갖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불법에 있는 우리의 처지가 어떠함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하루를 연장 받아야 할 가치도 이유도 없음을 알지 못하기에 하루의 은혜를 갖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형수는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불안한 삶 속에서 하루를 바라보지만, 신자는 죄와 불법이 사면된 자로서 하루를 바라보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오늘 살아있는 것에서 하나님이 베푼 하루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불법에 있던 자신의 위치를 보는 자들은 예수님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불법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음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불법으로 인해 어둠에 갇힌 나에게 한줄기 비취는 빛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죄와 불법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자랑은 자연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집니다. 신자의 자랑은 자신의 잘남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자신의 잘남을 바라보며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그는 아직 죄와 불법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보지 못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자랑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어진 것에 있습니다. 죄와 불법에서 벗어나 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의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지탱하는 것은 여러분의 손과 발과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보지 못함으로서 세상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세상을 보니 세상의 힘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더 확실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죄와 불법에 있던 우리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날 위해 구할 것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주어졌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임을 알고 모든 소원을 하나님께 두며 오직 그것을 위해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다시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제사로는 죄사함의 은총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제사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은총에 거하게 되었으니 예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께 한없는 은혜를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뭔가를 할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다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를 누리면 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왜 이것을 못미더워 하는 것입니까? 왜 자꾸 자신의 행위에 신앙의 근거를 두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를 말하나 예수님의 은총에서 벗어난 잘못된 믿음일 뿐입니다. 인간의 신념이나 의지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는 우리의 신앙 행위로 말미암아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어려운 처지라 할지라도 죄와 불법에 매어 있던 처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죄와 불법이라는 처지가 우리의 육신에 큰 어려움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기에 실감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에 몰려오는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불법은 한시적인 육신이 아니라 영원한 영혼의 고통으로 끝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미리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불법이라는 처지를 생각하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처한 환경은 어려움과 고통이라고 해도, 신자된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가 어떠한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은혜는 우리에게서 불평과 원망을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불평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나오게 됩니다. 편함과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으로 인해 지금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더 좋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불평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야 말로 스스로 은혜를 배격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랑이 무엇이고 기쁨이 무엇이고 감사가 무엇인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 무엇도 부럽지가 않은 복된 존재로 굳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