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브리서 1:10-14)
<설교>
마태복음 6:22절에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눈이란 단지 시각적인 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본들 세상의 이치를 보지 못하고 세상의 겉모습만을 본다면 그것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소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은 세상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본질과 이치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이 진정한 보물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각을 뜻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겉만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보물은 오직 세상에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거기에 두고 살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보물은 분명 다른 것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살아갈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무시하는 것들이 오히려 가장 귀한 보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10-12절을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을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세상을 멸망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세상을 멸망할 존재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에 대해서도 콧방귀를 낍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자신들의 노력과 힘으로 지탱하며 잘 굴러가고 있는 자신들의 공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발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눈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없이 보이는 것들이 성경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멸망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멸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세상에 있는 것을 귀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 아니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소망을 방주에 두었던 것입니다. 방주를 만드는 일이 그에게는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심판을 보지 못하는 시각으로 본다면 그토록 큰 배를 만드는 노아가 어리석게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홍수 심판을 믿은 노아에게 방주가 생명인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방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이것보다 더 가치있고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심판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멸망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쳐지지 않고 변화될 수 없는 것이 세상이기에 필히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라고 말씀합니다. ‘네 원수’라 그리스도의 원수를 의미하며 세상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세상이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해, 달, 별 등의 모든 것도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말씀하는 원수란 그리스도의 정신을 대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원수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유대인이 거부한 것은 인간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작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결국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죄인으로 여기는 예수님에 대해 반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원 역시 그리스도의 의로 주어지는 것일 뿐 너희들의 힘으로는 결코 되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은 끝까지 자기들의 의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들의 의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이며 그 배후에는 사단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만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고 거기에는 지금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사는 상태의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하시고 이미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인간에게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는 길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정신의 인간으로 전락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그리스도의 원수이며 하나님은 원수를 멸망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멸망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절에서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신자는 구원 얻을 후사입니다. 구원 얻을 후사를 섬기라고 천사를 보내실 정도로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존귀한 존재가 과연 구원 얻을 후사답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구원 얻은 후사로 산다면 세상이 살아가는 질서에 순응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질서는 힘입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사단은 이 질서에 예수님을 끌어 들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입니다. 떡을 위하고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를 위해 오신 예수님으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떡이 없으면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 세상의 고민이며 삶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을 후사는 떡의 문제는 하나님께 있다고 여깁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나 천국의 질서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신은 여전히 세상의 질서에 동행하면서 눈물만 흘린다고 해서 구원 얻은 후사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멸망하지만 오직 주는 영존하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영존하시는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고 사라진 가운데 오직 영원히 해처럼 빛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곧 멸망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자신을 감사고 치장을 했다 하더라도 멸망의 자식으로 남을 뿐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신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연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따라 살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외면한 채 세상을 바라보면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처럼 돈을 위하고 출세를 위하고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힘쓰며 사는 것에 더 마음이 가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인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암초를 향해 가는 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잠시 후면 깨어지고 파선할 배 위에서 파티하고 쾌락을 즐기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부럽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앞에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래 진리가 밥 먹여 주나 어쨌든 돈이 있어야 살지’라며 진리보다 현실에 굴복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두면서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의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라는 말씀을 마음에 두면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멸망할 것과 영존할 것을 보는 자로 살아갑니다. 어리석음이 무엇이며 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멸망과 영존이라는 갈림길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는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가 바로 복있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