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 히브리서 10:19-25 길

<본문>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19-25)

<설교>

사람에게는 습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매번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많은 인간이다 보니 행동이 반복됨으로써 그것이 습관화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해서 습관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습관적 행동이란 같은 행동이 반복되면서 나중에는 자동화되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왜 이같은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습관적 행동’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적 행동이 신자의 신앙생활에도 무수히 많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교회에서 정해 놓은 날과 시간을 따라 신자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많습니다. 예배, 기도, 묵상 등등 많은 부분들이 교회가 정한 시간과 날에 의해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정해진 날과 시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반복되면서 자신이 이것을 왜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단지 날이 되었고 시간이 되었기에 정해진 행동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지옥 가는 것입니까? 나 혼자, 아니면 그냥 가족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안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 사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예배당이 아닌 집에서 홀로 또는 가족끼리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예배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먼 길을 차를 운전해서 와서 모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물음을 하는 것은 정해진 날과 시간에 모이는 것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성도가 모이는 모임의 의미와 목적 등이 상실된 채 무작정 모이는 습관적 행동에 머물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주일 예배에 잘 빠지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25절의 내용은 주일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종말이 가까울수록 예배에 빠지면 안된다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생각할 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해당된다고 여기십니까? 주일에 잘 빠지는 분이 아니라면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주일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25절의 내용은 예배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주일에 전혀 빠지지 않는 신자라 할지라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해당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25절의 내용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신자가 모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자가 왜 모이는 것입니까? 사람이 모이는 것은 세상에도 많습니다. 동창회, 계모임, 직원들끼리의 단합 등등 수많은 모임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모임이든 관심은 사람이고 세상입니다. 즉 하늘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관심을 둔 모임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의 모임은 분명한 구별점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관심을 둔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신자 자체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따라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마음들이 서로 모이는 것이 신자의 모임인 것입니다. 이 모임에는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올 수가 없습니다.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이 모임을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유익도 즐거움도 없는 모임으로 치부해 버릴 뿐입니다.

그래서 19절부터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기 보면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라고 말합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휘장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여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언약궤를 가려 놓거나 지성소를 구별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음을 상징하는 휘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단절을 뜻하는 것입니다. 단절이란 곧 사망을 뜻합니다. 이것이 인간이었으나 당시 하나님은 일 년 한번 대제사장이 자신의 몸에 피를 바르고 나아오게 함으로써 생명의 길을 열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길이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생명의 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의 뜻입니다.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몸으로 말미암아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길이란 어느 한 곳과 다른 곳을 연결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길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하고 교통할 수 있게 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에 관심을 둘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의 상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단절되고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는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아는 사람만이 길 되신 예수님께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른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의 죄에 대해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은 것처럼 여겨버리기에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보기보다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더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배부름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예수님이 흘리신 피에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물론 자기 배부름에 관심을 둔 사람들도 입으로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안다고 할 것이고 감사함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피의 은혜가 그 마음을 채우고 있다면 육신의 배부름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배부름을 얻은 자로 살기에 그 무엇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에서 멀어진 존재가 예수님이 길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거하게 되었음을 아는 신자라면 분명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함이 없을 수가 없으며, 예수님에 대한 그 마음은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동일한 마음이기에 신자의 모임은 예수님을 향한 같은 마음이 만나는 것이고 이것을 신자의 교통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의식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예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높이며 믿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마음이 서로 만나서 동일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야 말로 참된 예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육신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만날 때 서로 무시하거나 비교하고 시기하는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모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나의 전부로 여기는 그 마음으로 모이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미 뒤로 밀려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가장 최우선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위한 세상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한 날과 시간이 되었기에 예배당을 찾는 것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해당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모임은 예수님만이 나의 길임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을 길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을 내가 행복해지고 살 수 있는 길로 여기면서 예배당을 찾는 것이라면 그는 이미 모이기를 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습관처럼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24-25절을 다시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길로 믿고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움을 볼수록 보이는 것은 길 되시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의지가 되고 믿어지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모이면 세상에서 배부름을 얻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배부름은 헛된 것이고 종말 앞에서는 모두 배설물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되신 예수님을 얘기하고 그 마음을 나누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한다는 것도, 서로가 믿음으로 산 삶을 나누며 힘이 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모임입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신자에게는 예수님만 보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보면서,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자 하면서 아무리 모인들 그것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