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 히브리서 10:26-31 하나님의 경고

<본문>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브리서 10:26-31)

<설교>

신자가 비록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말씀대로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이 그 실체입니다. 죄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해서 죄를 거부하고 선을 택하며 살아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살아있는 인간의 옛 본성이 여전히 죄를 좋아하고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가 제시하는 그 모든 것이 나의 옛 본성이 원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선을 원하지만 결국 몸은 악을 따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본문의 말씀은 고민과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6-27절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는 것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아는 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알았으면서도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았으면서도 죄를 범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참으로 심각한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런 자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을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으로 들리십니까? 진리를 알았으면서도 죄를 범한다면 다시 속죄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뿐이다는 뜻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속죄의 자리에서 쫓겨난 채 심판을 기다리는 불쌍한 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곧 진리를 알면서 짐짓 죄를 범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영원한 속죄의 은총을 누릴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본문은 어떤 뜻일까요? 먼저 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진리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참된 도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사라져도 변하지 않을 영원한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알았다는 예수님의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 받았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속죄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속죄의 은총은 죄를 범할 때마다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되는 속죄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드려진 속죄의 제사는 한번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죄는 반복된다고 해도 속죄의 제사는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의미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신자에게 믿음이 있고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죄를 이기고 죄를 짓지 않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에 있는 나를 책망하시고 속죄의 자리에서 나의 모든 죄를 덮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대하면 본문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해서 여전히 죄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속죄의 은총이 나를 덮고 있음을 발견하고 깊은 감사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는 말은 속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죄를 범한다고 해도 신자는 예수님의 속죄의 은총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피의 용서가 그의 죄를 덮고 있는 것이지 또 다시 주님의 속죄의 제사가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짐짓 죄를 범해도 여전히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으니 마음껏 죄를 범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심판이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죄에 대해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일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분명히 보이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용서와 구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의 의지까지 담겨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기어코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의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죄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본다면,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것이고 그 모든 심판을 예수님이 담당하셨음을 보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신자가 죄에 대해 담담할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죄에 대해 깊은 애통과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믿기 때문에 있게 되는 탄식이며 애통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맹렬한 불로 소멸하시겠다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남겨 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남을 것은 거룩하시고 깨끗한 분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기에 모두가 거룩된 존재로 여김 받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를 믿는 신자들 아닙니까?

30절을 보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나타내신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은혜를 말하면서도 정작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원수로 말씀하시고 반드시 원수를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원수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이 나타내신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함이 심판의 기준이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을 말하면서 행함에 의해 심판을 받고 상을 받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한 무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은혜를 말하면서 다른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30절의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그의 백성을 심판하셔서 지옥으로 가게 하신다는 의미로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살피며 살아갈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날마다 나를 심판하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는가를 자신에게 물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 많이 했는가?’ ‘성경 많이 보는가?’ ‘전도 많이 했는가?’라는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함으로써 쓸데없는 심판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기준을 바라보고 믿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오직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28-29절에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보면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이라고 말합니다(민 35:30-31). 즉 고살자의 죄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살아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전 제도는 이런 자의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자에 대해 예수님의 속죄의 은총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십시오. 모든 심판을 홀로 담당하신 예수님의 은총보다 귀하고 값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은혜는 나의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