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강) 히브리서 10:36-39 의인과 믿음

<본문>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36-39)

<설교>

39절을 보면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뒤로 물러가’라는 말의 의미를 믿음의 퇴보로 이해를 함으로써 신앙이 게을러지면 침륜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주일 성수, 봉사, 기도, 십일조 등등의 생활에 열심을 낼 것을 촉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뒤로 물러간다는 것은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벗어난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행위적인 측면에서 신앙을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행위가 적다고 여겨질 때 그것을 신앙의 퇴보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건강상 이유로 행위적인 신앙을 보일 수 없는 사람들의 신앙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침륜에 빠진다는 것은 물에 빠져 가라앉는다는 뜻입니다. 즉 멸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 행위적인 면에서 게으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신자가 멸망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신자가 남보다 봉사를 덜 한다고 해서, 남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적다고 해서 침륜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가’라는 구절을 행위의 퇴보, 또는 게으름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뒤로 물러가는 것은 곧 멸망의 자리로 되돌아감을 뜻합니다. 신자란 멸망의 자리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멸망의 자리에서 건짐 받았다는 증거는 믿음으로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 즉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 이전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 이전의 자리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깨달음이 있기 전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것은 인간의 의를 믿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주일을 잘 지킴으로 복을 받고, 십일조를 철저히 함으로 복을 받고, 기도를 열심히 함으로써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는 사고방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이전에 인간이 머물던 자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동원하여 믿음을 채우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봉사를 하지 않고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없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동원한 자신의 믿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이 없는 증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불안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보며 믿음에 자신감을 가진다면, 그는 행위가 부지런하고 부지런 하지 않음에 따라 그 자신감이라는 것이 변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그러한 변동이 없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사랑도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날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믿음의 약한 모습이 보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퇴보, 즉 뒤로 물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야 말로 뒤로 물러가는 사고방식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38절에서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의인을 살게 하는 것은 믿음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완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믿음이 있다면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고 믿음이 있다면 주일에 교회를 자주 빠진다고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주일 예배에 자주 빠져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고 예배를 자주 빠진다는 그것이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어 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이미 우리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교회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과 연관이 없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게 된다는 것은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방식의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가 아닌 교회를 바라보고 있기에 교회에서의 활동을 믿음과 연관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신자라면 자신을 살린 것은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이 믿음 하나만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사는 것이 의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인은 자신이나, 타인의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 있다 믿음이 없다’라는 판단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예수님의 피가 나를 용서 하셨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위를 기준으로 하여 신앙을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뒤로 물러가는 것일 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박국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박국 2:3-4절을 보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묵시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의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묵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하박국에서의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오신다는 하나님의 묵시가 성취될 것을 믿으며, 그 성취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면서 반드시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37절을 보면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하박국에서는 묵시가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여기서는 오실 이가 오실 것을 말합니다. 즉 묵시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실 오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박국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인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36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신자에게 인내가 필요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믿는다면 신자는 다만 그 믿음 하나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께서 모든 것을 완벽히 이루신 은총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인간의 행위를 보조 받아 더 완벽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믿음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데 그래도 내가 신자인가?’라는 의심에 빠져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뒤로 물러가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믿음이 행함으로 말미암아 증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행함이라는 것을 교회와 연관된 일이나 종교적인 행위에 국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행함에 대해 말하지만 야고보사도가 언급했던 행함의 부분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기에 그 마음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부자와 가난한 자가 예배당에 들어올 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결코 세상의 소유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안다면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여 대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윤리고 도덕일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기에 그렇게 하게 되어지기 때문에 행함에 의해 믿음의 의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결국 행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된 믿음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며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긴 자로 산다면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증거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이며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으로 기뻐한다면 그분이 나를 대하셨던 그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게 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의인에게는 믿음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모든 것이 채워진 사람, 부족함이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의인이며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