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본문>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4)

<설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사람의 한계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추상이며 보이는 것은 실체인데 실체보다 추상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한계로 인해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증거 삼아 사람을 판단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믿음의 여부를 그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실체는 인간에 의해 얼마든지 가공되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믿음의 증거로 강조하는 구제, 봉사, 기도 등등의 모든 행위들이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믿음이 있다는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믿음의 행위가 전혀 없는데도 그를 믿음이 있는 자로 여겨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자주 여러분께 말씀 드렸던 한편 강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한편 강도는 믿음이 있는 자였습니까? 없는 자였습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린 그가 낙원에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 낙원에 있게 될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름을 알 수 없는 한편 강도는 분명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한편 강도에게서 볼 수 있는 믿음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가 무슨 행위를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분명 강도에게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의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이 있는 자였고 그 믿음에 의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는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강도에게서 볼 수 있는 믿음의 증거라면 자신과 함께 사형수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을 의지하고 자기 영혼을 맡긴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죽을 자에게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인간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떤 가능성을 찾지를 않고 단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기에 예수님의 처지와 상황은 무시한 채 예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도들을 생각해 볼까요? 사도들의 믿음은 동일한 것입니까? 아니면 차이가 있었습니까? 믿음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행적은 각기 달랐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분량으로 산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분량의 행적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사도들 중 바울이 가장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다른 사도보다 믿음이 더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믿음의 증거물이 더욱 많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도들의 믿음에 차별을 둘 수 없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행위를 믿음의 증거로 삼아 믿음을 판단하고 구별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한 대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나타난 것을 가지고 믿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즉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존재하기에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이미 갖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증거가 있다면 그에게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확실한 실체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믿음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실상과 증거로 주어진 믿음이 있는 자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11장의 내용이고, 이런 면에서 11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믿음의 위대성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소개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믿음이 어떻게 일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을 본받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를 보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낸 믿음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로써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살았던 인물들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첫 번째 인물로 아벨을 말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믿음의 증거를 삼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본문을 보면 또 그게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하나님은 제물에 차별을 두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에 차별을 두고 그 제물을 믿음의 증거로 삼는다면, 결국 아벨과 동일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결론이 되지 않겠습니까? 즉 아벨의 제물을 현대 상황에 맞춰서 적당히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그것을 믿음의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본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고 더 나은 제사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의식에 있어서의 차이일까요, 아니면 제물의 종류의 차이일까요?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 증거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예물의 차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류의 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창 4:3-4절의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는 내용을 보면 가인은 곡식을 기르는 자로서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로서 양을 드렸습니다.

즉 자기 소산으로 제물을 삼은 것이기에 제물 자체에 질적인 차별을 둘 수 없으며, 레위기에 보면 곡식도 제물로 등장하기에 제물 자체의 차이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달랐던 것입니까? 위 구절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이었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레 3:16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찌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고 말하고, 레 27:26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본 것처럼 첫 새끼와 기름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즉 가인은 단지 자기 소산을 제물로 드린 것이지만 아벨은 자기 소산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제물을 통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아벨의 예물에 대해 증거 한다는 것은 아벨이 바친 양을 증거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통해 나타난 아벨의 구별 의식을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구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자신의 소산을 바치는 가인의 제물은 단지 바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며 받으실 것이라는 수준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바치는 행위에 중점을 두면서 제물에 신경을 쓰는 것, 다시 말해서 많이 바치고 정성스럽게 바치고 좋은 것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가인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물이 마음에 들어서 아벨의 것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달랐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인은 바치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수준이라면, 아벨은 자신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한 여호와의 것이라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벨의 예물을 받으셨다기보다는 아벨의 믿음을 받으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첫 새끼와 기름을 믿음의 증거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첫 새끼와 기름을 바친다는 것도 믿음이 없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첫 새끼와 기름을 바치는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문 하반절을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벨로 하여금 첫 새끼와 기름을 구별하여 제물로 바치게 했던 그 믿음이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아벨에게 있던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이며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바치면 복주시겠지’라는 생각에서 뭔가를 바치고자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여호와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조차도 여호와의 것이니 내가 여호와께 따로 바칠 것은 없고 다만 여호와가 나를 쓰실 뿐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믿음이 아니라면 ‘바치면 복주시겠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내 것을 바쳤으니 그 대가로 복을 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렸을 뿐인데 그 대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에서 떠나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행위를 기준하여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구별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합니다. 나의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떠나지 않게 합니다. 이런 신자의 삶은 분명 믿음이 없는 사람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이며 믿음의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