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 히브리서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본문>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브리서 11:8-10)

<설교>

대개 믿음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이라는 힘을 주신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믿음이 주어진 이후에는 믿음의 주체가 내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일단 믿음이 주어지면 그 다음부터 믿음을 책임지고 지키고 관리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믿음의 행위라는 것에 눈길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는 자신을 봄으로써 자신의 믿음에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선물하신 믿음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간 결과입니까? 믿음이 있는 나의 순종으로 본다면 결국 말씀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믿음의 행위라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행위가 곧 말씀에 반응하는 흔적이고 증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대다수의 교회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그 순종을 나의 반응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나를 이끌고 있다면 이미 나라는 존재는 믿음 안에 죽고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기에 나의 행위 또한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한다면 믿음의 열매라는 차원에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나는 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간다면 나는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조종 받는 로봇과 같은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믿음이 나를 붙들어 이끌어 간다는 것은, 가지 않으려는 나를 강제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의 모든 생각과 사고와 소망을 새롭게 함으로써 말씀을 따르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새롭게 된 나를 이미 ‘나’가 아니기에 나는 믿음 안에서 죽고 없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없이 11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결국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즉 믿음이 그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그들이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가 안되는 내용이고, 또 그게 그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말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주체를 누구에게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브라함 하면 떠오르는 것이 ‘믿음의 조상’일 정도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임을 굳게 세워주고 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의 주체를 아브라함에게 두게 된다면 결국 아브라함의 행위가 부각이 될 것이고 그러한 행위가 있는 아브라함 자체가 높임을 받게 될 위험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믿음을 가진 자로서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내가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믿음에 붙들려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은, 믿음을 받아서 그리고 소유해서 그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아서 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구출하여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자로 살아가는 세계로 집어넣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은 나를 새롭게 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같이 이러한 세계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어떻게 살까?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어떻게 어떤 길로 이끌어 가는가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믿음은 한 개인의 믿음의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야할 길과 아브라함의 앞일에 대한 모든 계획을 알려주고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 1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은 다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하신 것입니다. 지시한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이라는 것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모른 채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라고 합니다. 즉 젊은 때가 아니라 힘을 쓰지 못할 늙었을 때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어떤 생각을 하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말씀대로 했을 때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모두 접어 버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떠나는 것, 이것이 믿음이 이끄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계는 우리에게 참으로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음의 세계로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서의 종교 생활, 그리고 세상에서는 적당히 착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가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데 떠나라는 말씀 하나에 모든 것을 버리게 하고 떠나게 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이러한 믿음에 분명 반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를 고치면서 붙들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 붙들려 있는 삶, 이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믿음에 붙들려 있기에 다른 길로 가려고 발버둥 칠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길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어떠함과 악함을 익히 아신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부르신 것이 얼마나 큰 복이며 은혜이며 사랑인가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으로 이용하여 힘이 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잘 살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착각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자기에게 있는 상식을 가지고 생각한 결과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은 자신의 형통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잘되게 하시는 분을 참된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우상임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집을 버리고 떠나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 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떠난 자로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의 본토 나의 집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본토 나의 집이 있음을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빙자해서 세상에 자신의 집을 탄탄하게 세우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의 소유는 없음을 알게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배상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상법을 이용해서 피해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쉽지만, 사실 배상법은 피해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향한 규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해자란 없습니다.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나의 것’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의 소유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피해를 입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해자는 있지만 피해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해를 입었느니 배상하라는 요구를 할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특이성입니다. 배상은 가해자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9절을 보면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남의 나라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을 나의 나라로 보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로 살게 합니다. 믿음에 붙들린 신자라면 믿음에 의해 그러한 삶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를 편안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게 붙들어 놓기 위해 인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이 일에 100%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하늘나라와는 상관없는 존재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그러한가?’라는 의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어려움이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내가 뭔가 한게 없어서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세계의 맛을 보지 못한 못난 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자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시고, 믿음의 세계로 부름 받은 무한한 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