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 히브리서 11:11-12 믿음으로 사라는

<본문>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11-12)

<설교>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세상의 이해는 그 출발부터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믿음을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신을 향한 마음으로 이해합니다. 즉 내가 신을 믿기로 작정했으면 그때부터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지요. 결국 믿음의 주체가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주체를 자신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주체로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졌으니 믿음을 가진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치면서도 선물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도 믿음의 주체를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임이 분명하지만 선물을 받았으니 받은 선물을 가지고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믿음의 행위로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지되지 않고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이 아마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내가 소유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소유했기에 믿음을 소유한 자로서 어떤 증거가 있어야 하고 그 증거는 믿음의 행위로 드러난다는 것이 현대 교회가 버리지 못하는 고질적인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말씀을 통해 고쳐진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인간의 고집을 꺾으시고 기어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이 내포된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본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말합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여성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라가 나이 들어 단산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잉태하는 힘을 얻게 된 것이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기 때문인 것으로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사라가 잉태한 것을, 마치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믿음 때문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이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적이 이루어지고 원하는 일이 되어졌다는 이것을 믿음의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결국 좋은 믿음을 갖고자 하는 이유도 좋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느냐는 것입니다. 창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이 웃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신과 사라의 상태를 생각하고 불가능한 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 사라는 어떻습니까? 창 18장을 보면 사라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웃었습니다.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인데 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라에게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사라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기에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미쁘신 줄 알았다는 것은 신실하심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라는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신실한 분임을 믿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12절을 보면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 역시 사라로 말미암아 많은 후손이 있게 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분명 사라는 믿음이 없었던 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라의 믿음으로 인해 아이를 낳게 된 것처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서의 사라에 대한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오해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믿음을 가졌으면 그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즉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을 말할 때 기준이 무엇입니까? 복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느냐가 아닙니까? 교회가 복을 말할 때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인간의 행위에 두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라의 경우는 다릅니다. 사라는 믿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뭘 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데도 복을 받아 누리는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열심을 근거로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복은 결국 경쟁과 비교를 양산할 뿐입니다. 남보다 더 많은 복을 받는 것을 신앙이 좋은 증거물로 여기며 믿음의 목적과 이유를 복에 집중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여호와의 복에 거할 자격이 없는 나를 봄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하신 복을 누리게 하신 사랑과 은혜에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붙드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약속 또한 신뢰하지 않고 사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셨는데도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 그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다’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과연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때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는 삶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믿음의 요구대로 믿었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 중 누구도 ‘예’라고 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린 그런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면 그것은 오직 은혜며 사랑일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이러한 고백으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사라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라를 믿음의 세계로 불러 들이셨기 때문에 잉태하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라의 믿음 때문에 아니라 믿음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제대로 안된다는 말을 합니다. 신자가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이야기는 그러한 말을 부정합니다. 사라가 믿음이 없어서 아이가 잉태되지 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아이를 잉태하게 하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 뜻은 사라의 믿음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성취하십니다. 신자는 바로 이런 세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의 세계에 있는 신자가 ‘믿음으로 살면 복받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고 ‘믿음이 있다면 열심을 내야지’라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열심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자신의 행위에 구분을 두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라의 잉태는 하나님의 약속과 뜻에 의해 복을 누리는 세계로 부름을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복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적이 없는 자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시니 은혜와 사랑에 부끄럽고 고마울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에 들어있는 신자의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