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3-16)
<설교>
믿음에 대한 보편적인 오해는 신자가 믿음을 소유하여 그 믿음의 힘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실천하고, 하나님은 나의 실천을 보시고 기뻐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임을 사라의 믿음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라가 잉태했고 그것을 ‘믿음으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라에게 믿음이 있었다거나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잉태하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따라 일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가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원인이 되어 결과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인간은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라가 잉태한 것은 사라의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열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 없는 인간에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열심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에서 인간의 열심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으로 사라는’이라는 말 역시, 사라라는 여인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자를 붙들어서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열심을 증거하는 말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을 자기 소유물로 인식하기 때문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다스리고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절을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인간의 소유적인 측면에서 이 내용을 본다면 어떤 식의 해석이 되겠습니까? 당연 믿음이 있는 신자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아버지는 ‘내가 저 아이의 아버지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가 믿음으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기에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처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신자로 살자고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 초점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믿음 있는 자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믿음에 대한 오해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본향을 사모하며 산다고 합시다. 세상에서 나그네임을 믿으며 세상을 소망하기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산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그런 믿음을 창출했습니까? 여러분의 의지며 열심이며 각오입니까?
사람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세상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본향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외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본향을 사모한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그 다음부터는 내가 믿음으로 본향을 사모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즉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대로 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다고 해서 내 안의 악한 본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인데,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줬으니 이제부터 그 믿음으로 신앙생활 잘해라’고 하셨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믿음을 주신 후에 아무것도 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믿음만 던져주시고 나머지는 인간에게 맡긴 상태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돌다가 쓰러지는 팽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채찍질을 하는 것처럼, 힘이 떨어지는 신자를 찾아와서 힘을 주시고 채찍질 하는 일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날마다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증거하시기 위해 자기 백성을 믿음의 세계로 불러들이시고 날마다 믿음으로 그들을 붙드시며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여러분이 본향을 사모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되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과에 대한 공로를 모두 우리에게 돌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향을 사모하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실력자는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이것을 안다면 아무것도 못한 우리를 높여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뿐이지 ‘내 믿음’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높인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의 실력에 대해 대단한 착각을 가진 자의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얘기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을 칭찬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참으로 다루기 힘든 완악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드시면서 일하지 않았는데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말할 때 믿음을 가진 자로 뭘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믿음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믿음에 붙들려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위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향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믿음에 있게 되었느냐?’를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일하실 만큼 그들이 가치 있는 존재였습니까? 이 역시 아닙니다. 그들을 역시 멸망의 자식이며 소멸되어야 할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진심으로 믿음을 아는 것이고 믿음이 가지고 있는 참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근처에도 못간 것처럼 엉망으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붙들어 놓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감사와 기쁨과 찬송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이 감사와 기쁨과 찬송을 보시기를 원하시고 그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만 있는 고백, 이 고백이 맺어지도록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백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심으로써 세상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곧 본향을 사모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신자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까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온 힘을 다해 봉사하는 사람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일까요? 이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신자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본향을 사모하며 살게 합니다. 즉 믿음은 신자를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그가 곧 신자입니다.
세상은 신자가 거할 곳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자가 소망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생명이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세상을 소망하며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결국 영원한 생명을 향한 소망이 없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오해는 성경의 왜곡으로 이어집니다. 가령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씀하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내용도 믿음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며 살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실천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그 믿음으로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신자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에 항상 은혜와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신자에게 주어진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습니다. 은혜 아 사랑으로 인해 신자는 모든 일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데, 신자가 자신의 힘을 의지함으로써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을 기뻐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에 있음을 말해주는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시선을 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나를 보지 말고 믿음 가운데 불러들이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