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브리서 11:17-19)
<설교>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금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단순히 교훈적인 시각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는 책이 성경이기에 우린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교훈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다만 ‘이들은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교훈적 해석만 남발될 뿐입니다.
교훈은 실천을 요구합니다. 실천이 없는 교훈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훈을 받고 교훈대로 실천을 하고자 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훈대로 실천하고자 힘쓰는 것이야 말로 내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증거이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한 인간의 그릇된 계산식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일컫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죄인의 화해가 죄인의 실천과 종교적 열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으로 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의 희생을 피를 믿으며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 바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교훈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교훈적 해석의 폐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쉽게 교훈적인 시각으로 접근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물로 바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교훈적인 해석으로 접근하게 되면 어떤 말을 하게 되겠습니까? 분명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동을 아주 수준 높은 신앙으로 여기며,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참으로 귀한 것도 아낌없이 드리는 신앙인이 되자’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요?
사실 많은 설교들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를 중점으로 되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가 중점이 되어서 교인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행함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과연 그런 교훈적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되어져야 하고, 또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아들을 귀한 것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결국 돈을 아낌없이 바쳐야 한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복음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고자 하는 사람들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칠 것을 교훈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라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이삭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이해하시려면 제가 믿음에 대해 강조 했던 내용을 다시 상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로 부터지만 믿음을 받은 후부터는 내가 믿음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믿음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큰 오해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받은 후로는 믿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천을 해야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는 내용을 볼 때도 아브라함이 믿음의 실천을 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를 붙드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믿음을 가진 자로서 믿음의 실천을 하며 산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믿음에 붙들려서 믿음에 의해 살아가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믿음으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믿음이 있다’라고 하면서 믿음의 자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처럼 좋았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 이삭까지 아낌없이 바치도록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라는 교훈적 접근과는 전혀 다른 접근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바친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칠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관심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도록 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붙들려 살았고 믿음에 의해서 이삭도 아낌없이 바치게 된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이삭을 바치게 한 믿음의 내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8-19절을 보면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게 한 것은 하나님을 다시 살리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서 이삭의 죽음을 본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까지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조차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도 없는 아브라함을 아들까지 바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믿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는 자신을 바라봄으로서 믿음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랑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믿음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임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는 자 되게 한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담대하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께 항복하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나에게 항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 이 세대의 믿음은 거구로 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린다는 것은 내게 있는 귀한 것을 아낌없이 교회에 바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계심을 믿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 자로 산다면 그것이 곧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 백성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