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히 11:20)
<설교>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20절)라는 내용의 짧은 구절로 되어 있지만, 믿음에 대한 기존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자신이 원해서 야곱에게 축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긴 하였으나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자신이 뜻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삭이 에서를 축복한 것을 보면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이삭은 분명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를 축복한 것이 아니었는데, 성경은 이삭이 ‘믿음으로’ 축복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사라가 잉태한 것이 사라의 믿음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라의 믿음으로 인해 이삭을 잉태한 것처럼 언급하는 것에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소유적 개념에서의 믿음이 아님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에 대해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원래 이삭의 의도는 야곱이 아니라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했음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5: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야곱을 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축복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에서를 좋아하는 자기 마음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본래의 뜻대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이삭에게 야곱만 주셨다면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여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야곱이 에서를 속이고 이삭을 속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택한 야곱과 함께 에서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는 악한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린 때때로 하나님은 왜 나에게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게 하셨는가? 라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것을 없게 하시면 믿음 생활을 잘 하게 될 것이 아니냐는 착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것, 즉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지 않으면 분명 우리는 ‘왜 주지 않느냐?’는 불평과 원망에 파묻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있든 없든 항상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악함을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의 일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를 알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지를 못하는 탐욕으로 항상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아래 존재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인간이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힘쓰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성취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지 않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배워야 하는 것은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구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신자를 이러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고 날 위해 살아 보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하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믿음으로 누구누구는’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그 사람을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는 일의 결국은 이삭이 원한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되어졌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의 계획과 노력으로 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생각하신 대로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것은 ‘너희들 마음대로 살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단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해 주는 차원의 말이 아니라 ‘내 인생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됨을 안다’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나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이삭은’이라는 말은 이삭의 믿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삭의 무지함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간섭하심으로 그의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과 일하심을 보여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질 수 없음을 압니다. 또한 믿음에 의해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복된 자리로 부름을 입었음도 압니다. 그래서 신자가 바라보는 복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신과 연관된 좋은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육신과 연관된 세상의 좋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다니는 자신의 열심만으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는 달리 구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에 매달려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믿음이라고 여겼던 것이 믿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선한 것으로 여겼던 자신의 뜻이나 열심 등 모든 것이 믿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신의 욕망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에게는 의에 이를 만한 그 어떤 조건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드시고 내 뜻대로 살아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간섭하시며 이끄신다는 사실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신자라는 사실이 참으로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복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받지 못한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을 깨닫고 감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신자를 이러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복에 감사한다면 그것을 두고 ‘믿음으로 누구누구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믿음이 있어서 이런 고백을 하는구나’가 아니라 ‘믿음이 나를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갔구나’라는 의미의 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보장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장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약한 우리를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시기까지 놓지 않으시고 간섭하며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에게는 믿음 자체가 놀라운 선물이며 축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 존재한다는 것,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 이것을 축복으로 바라보기에 신자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성함을 맛보지 못한 자로 살아가기에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 욕심을 따라 흘러가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세계에 붙들어 놓기 위해 날마다 지키시고 수고하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