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11:21)
<설교>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을 자신의 노력과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되어진 결과임을 믿는 신자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이 활동하고 계심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믿음 가운데 살게 된 것이 모두 성령이 활동하시는 증거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성령의 활동을 믿는 자로 산다면 그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할까요? 내가 어제 예수를 믿었으니 그 믿음으로 오늘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어제 예수님을 믿게 하신 성령께서 오늘도 나를 붙들어서 믿음 가운데 있게 하심을 믿는다면 타인을 바라볼 때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가 다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인에 대해 고정적 인식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고치신 성령 하나님께서 내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고치고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내가 알게 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존재할 뿐이지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판할 권세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린 주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판단을 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지 타인을 비판할 수 있는 존재는 분명 아닙니다.
신자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판단을 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 하면서 뒤돌아서서는 타인의 말과 행동을 보며 구별하고 판단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죄인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서 죄인이라고 떠드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 것입니다. 거짓과 속임수에 능하고 세상의 것을 축복으로 알고 그것을 위해 힘썼던 사람이며, 하나님 역시 그러한 축복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여겼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야곱을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야곱은 엉터리 같은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고,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던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쳐가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야곱을 비판할 수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시고 그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서 비판과 판단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을 비판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누구에 대해서도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쳐가고자 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우린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누구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없으며 다만 무엇이 복음이며 믿음인가를 선포할 의무만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21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야곱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하나의 증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지팡이는 나이가 들어 힘이 없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된 것은 하나의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창 32장에 나오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사건입니다. 야곱은 이 씨름에서 하나님에 이해 환도뼈가 위골되게 되고 그로 인해 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이 환도뼈를 친 이 사건은 야곱의 힘을 무너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그동안 야곱이 복으로 여기며 그토록 얻기 위해 애를 썼던 힘들이 사실은 복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힘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을 고생했지만, 그가 얻은 힘으로는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를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고생했지만 결국 라반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원치 않은 레아까지 아내로 두게 되었고, 또한 자식으로 인한 그들의 다툼으로 인해 많은 심적 고통을 당했을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에서를 만나야 하는 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이런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복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자신의 본질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지팡이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지팡이를 의지했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쳐서 무너뜨리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이 요셉의 각 아들을 축복했다는 것은, 요셉의 아들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예전처럼 세상에서의 성공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사는 것이 복임을 알았기에 요셉의 아들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의 의미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힘을 쳐서 무너뜨리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게 있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야곱은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간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야곱이 요셉의 자식을 축복했다고 말을 하지만 이 역시 애당초 야곱에게 있었던 믿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축복할 때 축복의 내용을 바꾸시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겠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믿음으로 야곱은’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야곱에 비해 전혀 다르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모든 힘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세상에서 번듯하게 살고 싶은 욕망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힘을 꺾으시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곧 사는 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일에서도 달라진 야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르우벤에 대한 축복을 보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자식에 대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야곱의 말을 보면 르우벤은 힘이 있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르우벤은 자신의 힘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르우벤이 하나님에 의해 힘이 꺾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축복을 한 것입니다. 즉 힘이 있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된 것이 복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힘이 꺾여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된 야곱의 복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믿음에 있어서 대단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생각과 자기 힘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붙드셔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신자라면, 그가 원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일하시고 간섭하신 것처럼 내게도 일하시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을 갖고 있다면, 그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도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하나님이 일하시고 간섭하심으로 예수를 아는 자로 바뀌어 졌으며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믿음에 설 수 없음을 안다면 누군가가 비록 복음에서 벗어난 행동과 말을 한다고 해도 그를 비판하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나를 붙드시고 간섭하신 하나님이 그 역시 붙드시고 간섭하심으로 복음의 기쁜 맛을 알게 해주시기를 소원하면서 무엇이 복음인가를 전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의 악함을 보지 않으시고 그를 붙드시며 새로운 야곱으로, 즉 이스라엘로 고쳐가셨습니다. 이것이 긍휼과 사랑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이 긍휼과 사랑으로 지탱되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부름 받았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믿음을 가져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분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오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은 하루하루 믿음에 의해 인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귀한 하늘의 복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에 의해 인도 받는다는 것은 결국 믿음에 의해 생명의 나라에 거하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믿음으로 인도 받는 신자는 자신을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조건을 갖출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믿음으로 인도하신다는 놀라운 은혜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