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강) 히브리서 11:22 믿음으로 요셉은

<본문>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히브리서 11:22)

<설교>

마틴 루터가 작은 성경이라고 불렀던 요한복음 3: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내용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주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를 원한다면 그는 분명 영생을 소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영생을 소망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를 자신들이 원하는 하는 세상의 것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말하되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에서의 영화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믿음 없는 나를 붙들어 영생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잘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믿음이 우리를 만사형통으로 인도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헛된 소리일 뿐이며 위엣 것을 구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헛된 바람일 뿐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회사 문을 닫고, 암에 걸려 죽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일어납니다. 평소 열심히 믿음 생활하고 열심히 기도했다고 해서 소위 불행이라고 여기는 사건들이 그를 피해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실 것이고, 그러므로 여러 재난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을 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자신의 수호신이나 경호원쯤으로 여기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믿음과 상관없는 말일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를 구별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고 인도하시지만 항상 ‘하나님의 뜻 안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따라오기 마련이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중심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삶의 풍요와 안락을 위해 만사형통으로 이끄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믿음과 만사형통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은, 목사 본인이 노리는 것이 있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회를 찾는 자들이 그런 설교를 좋아하고 은혜롭다 하고 요구하는 잘못됨이 있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와서 목사로부터 그런 설교를 들음으로 믿음을 만사형통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찾을 때부터 만사형통을 기대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와 인종과 문화와 국가와 시대를 뛰어 넘어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인간의 본성은 동일한 것이고, 그 탐욕을 신의 힘을 빌려 채우려고 하는 종교성 역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종교를 이용하거나 신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본문이 요셉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요셉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만사형통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요셉이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된 것을 하나님이 그를 형통한 사람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요셉이 애굽으로 팔리고,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등의 고난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 형통을 주시기 위해 요셉을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고난과 어려움에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더욱 힘써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봉사하고 더욱 힘써 하나님께 바치면 결국 요셉처럼 형통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자기 인생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요셉도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성공을 주시기 위해 잠시 자신을 환난에 있게 하셨다고 생각할까요?

창세기 45:7-8절을 보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요셉은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을 자신의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큰 구원으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그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서 형들을 위해 사용된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요셉의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단순히 기근에서 구출하기 위해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근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요셉을 애굽에 보내 기근을 준비할 필요가 없이 아예 처음부터 기근이 없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요셉의 형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게 하고 그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을 팔아 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하는 그 모든 일의 과정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아픔을 외면한 자신들의 잘못됨을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아픔을 아는 이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이것이 생명인 것입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기에 애굽에 팔리고 결국 국무총리가 된 모든 것이 형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세상의 영화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를 생각하며 날마다 삶의 이유를 하나님께 두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셨으며”(22절)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50:24-25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요셉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당에 이르게 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들어갈 것을 유언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 해골이 되었는데 해골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어디에 묻혀 있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땅이 생명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국무총리이든 뭐든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에게 국무총리라는 세상적 지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워진 역할이었을 뿐입니다.

믿음은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므로 세상의 영화 따위는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지위에 있든 그 모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자리며,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아 사용되는 일꾼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그것을 힘으로 이용하여 타인을 다스리려고 하지 않게 되고, 더군다나 그것을 복을 받은 것으로도 열심히 믿어서 만사형통한 것으로도 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얼마나 누리며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죽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요셉으로 하여금 약속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해골이라도 애굽을 떠나 약속 안에 거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어떻게 세상의 영화를 제공하고 만사형통을 준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세상을 향한 탐욕에 치우쳐 영생을 향한 소망은 희미한 채 다만 믿음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동일합니다. 이처럼 동일한 죽음에 분명한 구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약속 안의 죽음과 약속 밖의 죽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든 죽음에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약속 안의 죽음이냐 약속의 밖의 죽음이냐가 중요한 문제일 뿐입니다. 한쪽은 생명이며 한쪽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약속 안에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면, 세상의 영화는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면서 힘든 삶이든 조금 편안 삶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나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생명 되신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흉내를 내는 거짓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세계를 사는 신자는 예수 안에서 살다가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을 소망할 뿐이지 세상의 영화나 만사형통, 복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해골을 약속의 땅으로 메어가게 함으로써 약속 안에서의 죽음이 되고 싶어 했던 이것이 요셉을 이끌었던 참된 믿음임을 기억하시고 오늘 여러분을 붙들고 이끌어 가는 것이 요셉을 이끌었던 믿음과 동일한 것인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자의 영생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약속한 바가 없습니다. 진리를 실천하여 살면 실천이 선이 되고 죄를 덮고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것도 있지만 그 모두는 하나님의 약속을 벗어난 인간의 거짓된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은 십자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지닌 약속을 의지하고 피를 증거 하는 것이 약속을 바라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