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 히브리서 11:23 모세의 부모

<본문>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브리서 11:23)

<설교>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고집하도록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도달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자 하게 됩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신자에게 왕이라는 호칭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모든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주권에는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는 것과, 생존을 유지시켜 주시는 것과, 외적인 모든 문제에까지 개입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은, 인간들 위에 군림하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삶과 죽음의 주인이시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두려움의 대상은 없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왕이라고 호칭하면서, 또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두려움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왕으로 인정해주는 것일 뿐 왕과 백성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낳고 석 달 동안 숨겨야 했던 이유는 잘 아실 것입니다. 요셉이 죽은 후에 애굽에는 요셉을 알지 못한 새 왕이 등극을 합니다. 이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고 창대하여 심히 강대하여지자 이스라엘에 대해 경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히브리 산파에게 명령하기를 히브리 여인이 조산할 때 남자는 모두 죽이라고 합니다(출 1:16).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한 산파들이 애굽 왕의 지시를 따르지 않음으로 바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자가 나거든 하수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출 1:22).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죽이지 않고 감춥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한 아름답다는 것은 용모가 아름답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출 2:2절을 보면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석 달을 숨겼다고 말을 하지만, 그 역시 단순히 용모의 빼어남을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갓 태어난 아이들의 용모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용모는 자라가면서 달라지고 차이가 나는 것이지 사실 갓 태어난 아이들의 용모가 얼마나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단지 용모가 준수해서 죽이기가 아까워 숨긴 것으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보여 집니다.

그럼 어떤 의미의 아름다움일까요? 누구나 부모에게 자식은 아름다운 법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다른 아이보다 내 아이가 더 잘생겨 보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아름다움을 보고 숨겼다고 말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내포한 의미의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당시 모세의 부모가 처한 상황에서 본다면 바로의 명령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겼을 때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숨긴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두려움조차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모세 부모가 믿음으로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으로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살아라’는 권면을 위해 모세 부모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담대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를 하기도 하지만, 믿음이 담대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얼마든지 담대할 수 있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는 단순히 복을 주고 복을 받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거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신자는 그의 자식으로서 만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왕으로서 신자는 그의 백성으로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자로 산다면 두려움의 대상은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다면, 그것은 힘에 의해 자신에게 다가올 어떤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는다면 결코 세상의 어떤 힘도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을 해할 수 없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해할 수 없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음으로 자연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어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는 증명이 필요 없고 과학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고 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의심이 없이 마치 본 것처럼 확신이 되는 것이야 말로 믿음이라는 은총의 세계이며, 능력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에 들어 있는데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 인해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임을 믿는다면 어찌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러한 관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기에 세상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믿음의 세계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거기에 엎드려 절하라고 하면서, 만약 절하지 아니한 자가 있을 때는 풀무 가운데 던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하지 않음으로서 느부갓네살의 분노를 사게 되고 결국 풀무불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은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단 3:15)는 말을 합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위협이 되고 두려움이 될 만한 말이었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라는 말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위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어떤 위협을 가한다고 해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죽는다는 것이 자신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냥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신자는 세상의 어떤 힘에 대해서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원해서 맺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게 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라는 사명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붙드시고 계시는 이 관계는 세상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관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그래서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믿으려고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나의 왕’을 외칠 것이 아니라 왕이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을 왕이라고 할 때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심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는 백성으로 택함 받고 부름을 입었음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대단한 것임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두려워 할 것이 없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으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설사 우리가 엉망으로 산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관계를 단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애당초 우리의 악함을 다 아시면서도 이루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에게 뭔가를 기대하시고 맺으신 관계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섭하시면서 고쳐 가시는 것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게 하기 위해 날마다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는 관계 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혼이 나도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버지께 매를 맞아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시는가?’라는 불평과 원망을 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각한다면 이렇게 살게 하신 것에도 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생각이 있음을 알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신자는 두려움이 없게 됨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믿음은 키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떠내려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시고 인간은 누구인가? 과연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분이시며 인간은 또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존재인가? 를 물으시며 하나님을 믿어주는 식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제가 있고 하나님을 앎으로 두려움이 없는 믿음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