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강) 히브리서 11:27 믿음으로 모세는

<본문>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브리서 11:27)

<설교>

본문은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린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을 떠나는데 왜 믿음이 필요 하는가?’입니다. 애굽을 떠나야 한다면 의견을 모아서 ‘떠납시다’하고 떠나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의지로 애굽을 떠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이라는 강대국의 종의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떠나고 싶다고 해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유로 믿음이 필요했을까요?

즉, 자신들에게는 애굽을 떠날 힘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애굽을 물리쳐서 떠나게 하신다는 의미로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이러한 의도에서 이해를 하기도 합니다. 내가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대신 해주심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믿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결국 그로 인해 바로가 여호와께 굴복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이기에 그러한 주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먼저 애굽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우리를 애굽에서 떠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을 애굽에 묻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자신들은 애굽에서 살다가 끝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야 할 존재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믿음으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라는 말은 믿음이 개입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과연 왜 믿음이 개입되지 않으면 애굽을 떠나지를 못할까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의지로는 애굽을 떠날 수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힘, 믿음이 개입하여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의지로 애굽을 떠나지를 못하는 이유는 애굽을 떠나야 할 땅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예 애굽을 떠나야 한다는 의지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이 날로 번성하자 애굽 왕은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고,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게 했습니다. 이러한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살기 좋은 땅으로 여겨질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땅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보십니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사는 것이 힘들고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면서도 우리 내면에는 세상의 것을 고대하고 즐기는 속마음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싫다고 하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이상한 모순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살기 좋은 땅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애굽에 있던 것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은 싫지만 애굽에 있는 것은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는 것을 그리워 한 것처럼 세상에 있는 것을 원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이 개입되지 않으면 애굽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몸이 애굽에 붙들린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이 애굽에 있는 것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가 어떤 힘에 붙들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는 것은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방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에서 끄집어내는 능력인 것이지 원하고 추구하는 세상의 것을 소유하게 해주는 능력은 아닌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본다면 믿음에 대한 오해와 착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는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지 내 뜻과 계획의 성취를 돕기 위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은 믿음에 대해 무지한 자의 어리석은 말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믿음이 모세를 담대하게 만들어 애굽의 임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간 큰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힘 있는 자가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고 해도, 그보다 더 힘 있고 강한 분이 나와 함께 한다면 그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임금이라는 강한 힘도 두려움이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어서 보지 못하는 것처럼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결국 상상속의 존재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해도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전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게 합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음이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보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야 말로 신자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하는 강한 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간다 할지라도 나를 해롭게 하지 않으시고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함께 하심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이 만든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어김으로서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이 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세 친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절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풀무불에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못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여기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도무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게 하는 능력임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 우리의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여겼던 것들은 다만 우리의 착각이었을 뿐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임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굽의 것을 소유함으로 애굽에서 편히 머물고자 하고, 힘있는 자에게 대해서는 부러움과 함께 두려움이 있는 이런 모습들이야 말로 믿음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애굽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애굽에 있는 것을 구함으로 편히 애굽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 열심인 것을 두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의 열심의 가치를 높여줌으로써 더욱 더 향상된 열심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술책일 뿐입니다. 믿음은 교회조차 떠나게 합니다. 교회를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바라보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게 할 뿐입니다.

믿음은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끄집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세상에서의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자, 즉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인도 받음을 아는 신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고백으로 남게 됩니다. 믿음이 나를 이렇게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가 있음을 보는 신자라면 사실 무서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협할 힘은 세상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보는 결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힘을 무서워하지 않게 하며 세상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으며 가장 강하신 분을 의지하고 어떤 일에서도 담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