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 히브리서 11:28 믿음과 유월절

<본문>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브리서 11:28)

<설교>

인간이 제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도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이라는 굴레를 억지로 씌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은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죄인이라는 선언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다 한다고 해도 인간은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죄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것 자체를 두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나라는 존재성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인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일에 실패 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존재성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나 우리나 모두 같은 본질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착한 행실도 선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속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음 받는 아브라함까지도 자기 존재성에 매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그들의 의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매어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할 뿐입니다.

본문의 모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28절)라고 말합니다.

당시 애굽의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한다는 것은 애굽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애굽으로부터의 독립은 애굽과 투쟁하여 승리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다는 것은, 모세가 믿음으로 애굽과 투쟁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었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모세가 그런 인물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그들이 내 말을 듣겠습니까?’라는 나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또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바로가 화를 내면서 오히려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구우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자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결국 이스라엘이 더 학대를 받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않는다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약한 모습을 한두 번 보인 것이 아닌 모세가 결국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되고 유월절 피 뿌리는 예를 정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세만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믿음의 사람은 없습니다. 연약하고 의심 많고 흔들리기 쉬운 자에 불과할 뿐이지만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믿음으로 인한 담대함을 보여준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솜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약한 모세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은 애굽의 재앙을 통해 증거 되었고, 그중에서도 열 번째 재장인 장자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무서움과 강하심이 증거되었습니다.

애굽은 장자 재앙에서 하나님의 강하심과 무서움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장자 재장에서 이스라엘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습니다. 즉 죽음에서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세상은 다 죽어도 이스라엘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죽음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피로 인한 이스라엘의 강함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것이 아니라 피가 강한 힘으로서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보호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죽음조차 이기는 강력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문설주에 피를 발라라고 하신 것은 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피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사망도 자신들을 어찌 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는 일에 왜 믿음이 동원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피를 아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장자 재앙은 이스라엘을 죽어서는 안되는 존재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죽어서는 안되는 존재로 구별되었다면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일은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에게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도 죽음에서 예외가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런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죽음의 천사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어린양의 피만을 바라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피가 그들을 살리는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믿는다는 것은 ‘죽어야 할 자가 피로써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인데, 문제는 사람이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피를 믿는다는 것은 죽어도 마땅한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강력한 능력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도 어찌 하지 못하는 능력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를 믿는다는 것은 강한 것이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고 남보다 가지지 못한 것 등으로 신세 한탄을 한다면 그것은 피라고 하는 강력한 능력 아래 보호 받고 있는 신자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기다리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셨고 또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무능력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재앙을 그들의 힘으로 막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종이었던 나약한 이스라엘이 재앙을 이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 피를 믿고 있습니다. 피를 믿는 이 믿음이야 말로 신자에게는 힘이고 위로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죽으면 천국가게 한다는 보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하시고 지키신다는 확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믿는 것은 죽어 마땅한 자가 생명을 얻었음을 믿는 것이고,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나를 사망으로 이끌어 가지 못함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세상에 대해 두려운 것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에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에 담겨 있는 강함과 담대함의 의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를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보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피를 믿는 자는 세상이 감당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