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강) 히브리서 11:30 믿음과 여리고

<본문>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히브리서 11:30)

<설교>

천국은 어떤 사람이 가느냐는 것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여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맞는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정확한 것은 성경에 천국 간 사람들, 또는 멸망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천국을 갔고 무엇 때문에 멸망을 받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천국 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그 사람을 천국 보내신 기준으로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천국을 보내시는 기준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원한 대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천국 보내시는 하나님의 기준을 알았다고 해서 내 스스로 그 기준에 나를 맞춰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도무지 우리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외면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천국을 보내시는지 그 방식, 기준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국 보내시는 방식, 기준을 왜 세상이 믿지를 않습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말합니다. 잘 아시는 여리고 성이 무너진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홍해가 갈라진 것만큼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적을 많이 원합니다. 기적을 원하는 것은,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나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적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가 갈리진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기적으로 그들은 죽음의 위기에 구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삶의 질이 달라졌습니까? 홍해를 건넌 그들을 기다린 것은 광야였습니다. 기적이 이스라엘을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삶의 질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기적은 삶의 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고 이스라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기적을 기적으로 보지 않는 우리의 무지함이 문제인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기적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전혀 전투를 하지 않고 그냥 성을 돌았을 뿐인데 그 커다란 성이 무너졌기에 기적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믿음이 이러한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까? 이것을 오해하여 어떤 사람은 ‘저것이 내 것이 된다’는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내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여리고가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여리고가 무너진 이유, 즉 여리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가 무엇임을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여리고가 무너진 이유가 누가 멸망을 받는가에 대한 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그 기준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 분명하기에 여리고가 무너진 것은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 6:8-9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돌 때 그냥 아무렇게나 돈 것이 아니라 제사장 일곱이 나팔을 불며 앞에서 진행하고 언약궤가 그 뒤를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거룩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이 앞에 서서 나팔을 불며 진행을 합니다.

나팔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에서 나팔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장이 나팔을 부는 그 뒤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인간의 죄로 인해 정결한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현장입니다.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언약궤의 피를 믿지 아니하면 그들 역시 멸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심판과 구원의 중심에 희생 제물의 피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피를 믿는 자는 살고 믿지 않으면 멸망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포의 내용입니다.

결국 여리고가 무너진 것은 희생 제물의 피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로써 그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존재로 여김 받을 수 없기에 멸망의 자식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사느냐는 것은 보지 않으십니다. 누가 희생의 피를 믿느냐만 보시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다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신자로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피를 믿어야 천국 간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피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나를 예수님의 피를 안다’라는 생각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홍해 사건에서 애굽의 군대가 죽어야 했던 것은 그들이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렇게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여리고가 악한 짓을 많이 해서 멸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어린양의 피와 상관이 없는 존재라는 것 때문입니다. 세상이 과연 이것을 이해할까요?

신자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죄가 없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악을 덮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살아남을 자는 나의 모든 악이 예수님의 피로써 용서되었음을 믿는 거룩한 신자들뿐입니다. 그 외는 모두 부정한 자로 취급되어 멸망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거룩한 제물이 흘린 피로써 내가 깨끗함을 입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믿지 않는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음을 믿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자는 여리고를 돌고 있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즉 세상을 돌고 있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세상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며 돌고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세상에 있는 것으로 부러워 한다는 것은 거룩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세상을 돌고 있는 것이 신자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거룩한 것만 남기고 더러운 것은 모두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바위가 되고 산성이 되고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는 것이야 말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한 존재인 내가 거룩하다 여김 받고 영생에 이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믿는 믿음이 내게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기적에 대해 잠잠합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거룩한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돈이 보이고 자기 자신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이 세상은 잠잠하나 신자에게만은 하루하루의 힘이 되어야 하고 위로가 되고 복된 소식이 되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