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35-38)
<설교>
모든 강물은 그 길을 따라 흐릅니다. 누군가가 강제로 물길을 바꾸지 않은 한 길이 있는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의 자체적 의지가 아닙니다. 길이 있기에 물이 흘러갈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길이 물을 이끌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물이 흐르고 싶은 길을 스스로 정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은 길을 따라 흘러가게 될 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흘러가지 않는다며 자기 신세한탄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강물이 제 아무리 바다로 가고 싶다고 해도 길이 바다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다면 결국 바다를 꿈꾸는 것은 환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환상이 현실과 부딪히면서 불만과 원망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인생은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물입니다. 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기에 인생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숙명론적인 인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주장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의 길을 바꿔 보고자 신에게 도전을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동원해서 신을 자신의 믿음에 굴복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 신도 감동을 할 수밖에 없는 강한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노력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사 노력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믿음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여서 원하는 것을 받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사람들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길을 바꾸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이끌어 가는 길에 순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즉 믿음은 나를 이끌어 가는 길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맡기고 길을 따라 흘러가게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 길에 바위가 있고, 구부러진 길이 있고, 급경사가 있어서 부딪히고 요동을 치며 흘러가게 된다고 해도 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38절을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는 말을 합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세상이 감당치를 못했을까요? 또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세상이라는 큰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세상을 감당하지 못할까요? 사람에겐 저마다 욕망이라는 것이 있고, 그 욕망이 목적하는 것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결국 날마다 채워지지 않는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이것이 세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며, 따라서 죽는 순간까지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불안과 불평과 원망, 그리고 염려와 근심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흘러가는 길에 바위가 있는데, 정작 나는 바위가 없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바위가 없기를 기대하고 신에게 소원을 빈다고 해도 바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에게 빌었으니 바위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가 막상 바위가 나타났을 때, 그 현실을 감당하지를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자기 환상과 자기 욕망을 가지고 인생길을 감으로써 세상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며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에서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5-38절)고 말합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길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길에는 세상을 향한 환상과 욕망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가는 길에서 나타난 모든 험악한 것에 자신을 맡기고 그대로 흘러갔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이끌려 갔던 그들의 길입니다.
이들의 삶이 똑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다른 환경과 형편을 살았었지만 이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 것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의 믿음은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믿음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같은 믿음이기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믿음이 그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였다면, 현대의 신자 역시 믿음에 의해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모습으로 증거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올 수 있는 고난과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믿음을 빙자하여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러한 믿음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기독교는 믿음의 극심한 오해에 빠져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믿음을 오히려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헛된 믿음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내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심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욕망에 붙들려 하나님을 찾는 결과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길 앞에 놓여 있는 바위를 치워주는 것이 아니라 바위에 부딪혀 아프고 힘들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줄을 굳게 믿고 기도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단의 소리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이 꿈꾸는 행복의 현장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참된 신으로 여기게 하는 것이야 말로 사단이 목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신자는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행복한 삶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행복이지 세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음으로 누리는 행복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고난도 악형도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게 합니다. 35절을 보면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게 한 힘이 무엇입니까?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는 믿음입니다. 더 좋은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악형도 구차히 면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사람은 그 자체가 이미 저주이고 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 그 무엇보다 부활이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더 좋은 것을 얻는 것이기에 악형도 면하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도 이들처럼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한다면 과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믿음이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해주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많은 사건과 상황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과 사건들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고 힘들게도 할 수 있고,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것을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사전 통보도 없이 갑자기 여러분 앞에 등장합니다. 이 모두는 재수가 없어서도 아니고 우연히 벌어지는 일들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러한 현실로 이끌어 가실까요?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더 좋은 것이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엿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고난이 있을 때 참고 인내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것도, 여전히 세상에 매여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다만 고난에서 주님의 아픔과 고난을 엿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하늘의 좋은 것을 바라볼 뿐입니다. 부활의 세계 밖에 있는 모두가 저주에 파묻힌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기에 더 좋은 부활 때문에 악형도 고난도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도 악형도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들이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기에 하나님이 벌리시는 현실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뜻이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뜻이 실현되는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현장일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뜻의 실현, 즉 자기 욕망에 파묻혀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에 고난이 있는 이유는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더 좋은 세계가 있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자가 고난을 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보다 더 좋은 세계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이 신자에게 더 좋은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고, 어떤 고난도 구차히 면해보고자 하지 않는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