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브리서 11:39-40)
<설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사단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사단에게 밀려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단의 활동을 하나님이 허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단의 활동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어두움의 세상이 사단, 즉 악한 영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묵인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단의 사고방식에 순종하여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을 말할 때 아주 악한 존재로 연상하게 됩니다. 물론 사단이 악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성경이 ‘악하다’고 규정하는 것과는 다른 악함을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악하기 때문에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도록 유혹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인, 강도, 도둑질, 사기, 유괴, 등등의 나쁜 짓을 일으키는 것이 곧 사단이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착한 행동은 천사와 연관 짓습니다. 그래서 흔히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도 그가 남을 돕는 일을 많이 하고 성격이 부드러운 등의 조건을 보고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단의 교묘한 자기 위장입니다. 선악을 예수님을 기준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기준하여 판단하게 함으로써 세상의 윤리 도덕에 자신을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이 사단의 술수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세상 사람들 역시 윤리 도덕으로 자신을 위장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처럼 세상의 윤리 도덕을 악한 것으로 말한다면 분명 세상은 발끈할 것입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예수를 말하는 교회조차도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부정하는 말이라며 발끈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어둠의 세계가 표방하는 의로 포장하려는 악한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함에 묻혀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에 붙들려 지배 받는 상태에서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한 어둠의 세계에 대한 바른 판단 역시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의 세계를 깨뜨리고 굳게 선 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오로지 어둠의 세계 속에서의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좋은 것이란 오직 자신의 가치를 향상 시켜주는 모든 조건과 수단들로 여겨질 것이 뻔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의 악한 영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함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못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만을 바라볼 뿐이며 세상 속에서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세상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39,40)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들이 어둠의 세상 속에서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관심을 일으킬까요? 과연 관심이 될 내용이 있습니까? 39절에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이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말에는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이라는 말을 악한 영이 이끄는 대로 해석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말씀의 뜻, 문맥, 의미, 하나님의 마음,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말씀을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게 좋은 것이 더 관심거리고 하나님의 뜻 역시도 자신의 관심거리 속에서 해석을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 하늘의 사고방식으로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누리려고 하고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악함을 드러내시면서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어둠의 세계의 실체를 제대로 보게 하시고 악한 영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셔서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지식과 지혜로도 깨달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해서는 철저히 가려져 있는 비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아무나 천국에 올 수 없도록 막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는데, 과연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39절의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라는 말씀에서 이 사람들이란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분명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약속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39절에서는 이 사람들이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한 약속은 약속의 실체, 즉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의 성취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도 온전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잊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의 삶이 자신을 온전케 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의의 세계는 온전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의의 세계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온전치 못한 우리를 온전케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40절에서 ‘더 좋은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온전치 못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온전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반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원하는 것은 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온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세상 나름대로 온전해지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윤리와 도덕입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과 윤리로 온전함을 이루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보다는 자신의 행함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이러한 사고방식이 악한 영의 활동에 지배받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것이 곧 악한 영의 활동에 합류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함을 입어 의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으로도 온전케 될 수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케 되어 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나라가 관심이 아닌 자들에게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 관심 밖이 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믿음을 말하며 예수를 말하는 우리 자신들에게도 어둠의 세계처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악한 영의 사고방식에 합류하고 있는 증상임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본문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악한 영의 세계, 즉 악한 영의 사고방식에서 구출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결코 어둠의 세계에서 우리를 굳게 세워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단의 사고방식에 의해 생산된 거짓 믿음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나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형편과 조건이 힘들고 어려워도 변함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 인도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세상도 감당할 수 없는 신자의 강건함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에 머물게 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징계하기도 하시고 매를 때리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 좋은 것으로 채우고자 하시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왜 나에게 예수님이 좋은가를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긍휼도 알 수 없습니다. 항상 세상에 시선을 두면서 세상 것을 기준하여 사랑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분으로 존재할 때, 예수님을 좋은 것으로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왜 때로 하나님만을 믿고자 하는 자기 백성을 힘들게도 하시고 고난으로 이끌어 가시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모든 일들이 온전치 못한 나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들어 놓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