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강) 히브리서 12:1-2 온전케 하시는 이

<본문>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1-2)

<설교>

밖에서 오물을 잔뜩 묻혀 집에 들어온 아이가 어머니를 돕는답시고 집안 청소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어머니를 돕는 것이 될까요?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어머니를 도와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대 교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잘못됨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지만 정작 자신이 오물이 잔뜩 묻은 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 전혀 도움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믿음이 우리를 깨끗이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우리들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깨끗하다면 우리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깨끗한 것이 되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서 깨끗한 것이 나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는 우리들에게서도 나오는 것은 여전히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입니까? 믿음이 좀 더 자라면 깨끗해 질 수 있을까요? 그것 역시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를 깨끗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효능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가 오물 묻는 더러운 자임을 알고 깨끗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러운 나를 위해 깨끗하신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들리는 것은, 믿는 자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열심히 구제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보는 것을 신자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심이 없을 때 게으른 믿음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하지만 성경 어느 곳에서도 믿음을 그러한 종교적 열심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교회가 세워졌지만 바울은 어느 교회에서도 앞에서 말한 행위의 열심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믿을 것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외치실 때 유대인들 가운데는 열심당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열심을 칭찬하셨습니까? 과연 그때 그들의 열심과 지금 교회가 말하는 열심히 어떻게 다를까요?

예수님께 믿음이 있는 자로 칭찬받은 혈루병을 앓은 여인, 소경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을 위한 열심으로 믿음이 있는 자로 칭찬을 받았습니까? 물로 그들에게도 열심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예수님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온전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열심인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가 강조하는 열심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고침받기를 원했던 이들은 자신이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전치 못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소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것,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찾았던 소경, 문둥병자, 죄인들과 우리가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면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고침 받는 복음서의 내용은 단지 ‘육신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기도하면 낫는다’라는 미신적 요소로만 받아들여질 것이 뻔합니다. 또 그렇게 성경을 이용하는 무리들이 설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 비록 성경이 우리에게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이 말에 순종할 사람은 예수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됨을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바라본다 할지라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예수를 바라볼 공산이 큽니다. 다시 말해서 원하는 것을 얻거나 병을 고침 받고자 하는 목적으로 자신의 일을 도와주거나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도 아니고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도 아닙니다.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 오셨는데 정작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가 내가 온전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아니라 교회가 잘되고 내 사업이 잘되고 병이 낫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예수를 찾는다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겠습니까?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 먼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내가 온전한 존재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소경이고 문둥병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나는 저주에 붙들린 불쌍한 존재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연히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절박한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에게는 이것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소경과 문둥병자와 같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소경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할 뿐, 죄 가운데 있는 자기 실상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의 신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위에 파묻혀서 자기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 받았음을 말하면, 자신은 바리새인과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무장을 해버립니다.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반대하고 십자가에 죽인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다움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다움 말입니다. 인격적으로 고상해지고 종교적으로도 뛰어난 활동으로 자신을 가꾸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위한 일, 선한 일을 도와주고 힘을 주는 예수를 원할 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온전케 해주시기만을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문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죄인인 것은 맞고, 온전치 못한 사람인 것도 맞지만 그것은 모두 옛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온전케 되었고 구원을 받았으니 온전케 된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온전케 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고,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생각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열심 있는 종교적 활동과 교회 일에 국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나를 온전케 하실 수 있음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케 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온전케 하심을 증거하고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온전케 된 사람답게 사는 것은 나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 역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높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최고의 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전시장에 걸려 있는 전시품이 아닙니다. 전시장에 들러서 잠깐 구경하고 돌아가면 되는 예수님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는 영생이고 구원이고 선물이기에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항상 나를 향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기에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서도 무관심해 버립니다. 이러한 우리가 나의 문제성과 심각성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언제나 벽에 걸린 그림일 뿐입니다.

믿음은 종교적 활동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의 불쌍한 처지에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되기에 주를 바라보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로 살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발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통곡하는 그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는 온전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를 바라보고 사는 것에도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찾는 것이 취미생활의 일환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그렇지 못합니다. 성경은 천국을 말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세상만 들어옵니다. 천국이 소망이 아니라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소망을 위해 예수를 찾으면서도 그것이 멸망으로 향하는 길임을 생각지 못합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밀쳐 내 버립니다. 자기만의 예수를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완악함이 말씀에 의해 고침 받고 온전치 못한 나를 온전케 하신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 되기를 소원하며 예수님을 찾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자다운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자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온전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온전한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여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는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