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강) 히브리서 12:9-13 징계의 유익

<본문>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브리서 12:9-13)

<설교>

하나님의 징계를 죄를 범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오해하기 때문에 징계에 담겨 있는 유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징계가 신자에게 유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은, 징계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신자로 하여금 천국을 소망하도록 하기 위해 육을 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도 징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유익을 경히 여기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징계는 결국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며 천국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징계를 통해 주어지는 유익을 놓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편함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주는 유익은 세상의 헛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아무리 소유한들 그것이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 징계의 유익입니다. 세상의 것이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우리의 눈에 그리스도가 보이게 됩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신자로 변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가를 안다면, 그리고 그러한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한다면 나를 징계하셔서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징계 역시 피할 것이 아님을 알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징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떤 자로 달라져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11-13절을 보면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즐거운 것이지만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징계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후에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은 이러한 말에 얼마나 공감하십니까? 세상의 관심은 의의 평강한 열매 따위에 있지 않습니다. 즐거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당장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에 감춰져 있는 즐거움을 보지 못하고 슬픔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계로 말미암아 진리의 바른 길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일으키시고 진리의 길을 가는 자로 만들고자 합니다. 세상은 모두가 진리가 아닌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굽은 길을 가고 있는데 이런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진리의 길을 가는 자로 만들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가기를 소망하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징계가 큰 유익일 수밖에 없고, 징계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의의 평강의 열매로 인해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편한 인생길을 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징계를 동원하여 세상을 향한 소망이 헛됨을 알게 하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을 동원하여 자신의 고생을 덜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고생을 안하고 사는 것을 믿음의 열매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악함입니다. 이러한 악함이 유익이 있는 하나님의 징계조차도 악한 것으로 밀쳐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나를 고생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악한 것이라는 선악개념에 붙들려 있기에 유익이 되고, 즐거움과 감사로 맺어질 수 있는 징계를 피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피하기 위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게 되고 결국 주일에 교회를 안나오고, 기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도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결코 우리에게 이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우리를 세상이 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다른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시고 우리를 연달하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육을 추구하고 육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바라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세상이 추구하지 않는 영을 추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만드신 다른 세상이 있음을 증거 하라고 여러분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나 같은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징계로써 인도하시는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기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징계의 유익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쨌든 육신의 고생을 피하는 것을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기쁨, 즐거움과 같은 것은 관심 밖이고 육신의 편함을 누리는 것을 신앙의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나 같은 자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징계하셔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사랑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기쁨을 맛보게 될 때 세상이 제공하는 기쁨이라는 것들이 결국 허무한 것이고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앙을 고생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만 여긴다면 사도들은 참으로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자신의 고생을 부끄러워했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했습니까? 자신의 믿음에 의심을 했습니까? 바울은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큰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징계를 고생으로만 여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큰 기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뿐, 기쁨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여러분의 편안함입니까? 세상이 추구하는 기쁨이 결코 기쁨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기쁨으로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기쁨으로 여러분에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징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즐거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