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히브리서 2:10-18 형제

<본문>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브리서 2:10-18)

<설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여러분을 구원하신 그 뜻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천국이라는 좋은 곳에 집어넣어서 영원토록 편히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일까요? 만약 구원의 의미를 이런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자신 밖에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발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구원은 그 뜻의 성취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 때 구원받은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 즉 신자의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라는 말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게 하신 분이 있으며 그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지금 너무 뻔한 내용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분이 있다는 사실은 누가 모르겠습니까? 어린아이까지 다 아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 않습니까?

하지만 잘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존재케 하시고 만물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안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존재케 하시고 나의 근원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세상만물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까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존재하게 하신 분이 있고 우리는 지금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이제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마땅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단순히 세상에 존재케 하시고 세상을 살아가게 하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가시는 일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구원의 주를 고난 받게 하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음을 맛보게 하셨다는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아야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이끄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때문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로 인해서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시고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림 받은 것까지 우리의 노력과 힘은 그 어디에도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일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을 두고 사는 신자라면 하나님에게서 세상의 복을 바라보기 보다는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우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높이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누리는 혜택과 유익이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서로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은총을 혜택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의 것 때문에 나약해질 이유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에서 났습니다. 즉 근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예수님 편에서 볼 때 우리 같은 존재를 형제라 일컫기에는 부끄러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내세울 것이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께 세상의 지탄을 받는 죄를 지은 아들이 있다고 할 때 과연 그 아들을 세상에 내세우면서 ‘이 아이가 바로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혹 여러분의 형제 가운데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를 ‘내 형제다’라고 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 같은 존재가 예수님의 형제로 여겨진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영광이지만 예수님에게는 부끄러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한분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하나님께로 난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고난의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되어진 일이고 그 계획 또한 하나님 스스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린 다만 놀라운 은총과 은혜를 덧입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안에서 무엇 하나 내세울게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해 감사하고 찬송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위해 여러분을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님의 형제다운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악한 우리로 인해서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셔야 했고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닙니까?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 더욱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으로 서로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로 만나는 것이고 참된 교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형제의 관계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 형제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 관계는 우리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관계에서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 ‘형제’로 일컬어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형제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만을 보십니다. 여러분 역시 서로에게서 그 사람의 외적인 조건이나 됨됨이를 보려고 하지 말고 그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여러분은 온전한 형제의 관계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대하시듯 여러분 또한 형제를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의 행함이 아니겠습니까?

12절에 보면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라고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는 것은 주의 이름 아래 만나고 함께 하는 것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는 단순히 교회에서 만나서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하고 친분을 가지는 육신적 관계가 아닙니다. 형제란 영적인 관계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신 주님의 이름 아래 모이는 영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 아래 있다는 것은 내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신자에게 자신의 이름이 관심거리가 되겠습니까? 이처럼 주의 이름 아래 모이는 형제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내세우고자 하는 것은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만나서 무엇을 하십니까? 혹여 세상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내세우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그것은 형제로 다가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 아래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저 사람이 내 형제인가?’를 살피기보다는 ‘내가 저 사람에게 형제로 다가가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보고 판단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을 살피시고 판단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를 찬송하면 그것으로 이미 온전한 교회입니다. 여기에 ‘교회가 무엇을 열심히 하는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모이게 하시는 것은 그 이름이 찬송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모이는 이들이 곧 알곡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피로써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룩함을 입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멸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 인생의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시면서 날마다 주님의 형제로서 주의 이름을 높이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께 주어진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