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브리서 12:14)
<설교>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논해서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모여서 성경을 얘기한다면 그 주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주제가 되어서는 안되고, 세상에 모든 가치관을 둔 우리의 인생이 주제가 되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경 이야기가 참으로 따분한 내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4절)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평과 거룩함이 없는 결과를 주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은 전혀 절망적인 내용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에게 절망은 모두 세상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화평과 거룩의 문제에 대해서도 시큰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님께 마음이 가게 되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는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세상이 보는 것은 단지 몸이 살고 죽는 것에 불과하지만 신자는 예수 안에서 그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까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몸의 죽음에 대해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막아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곧 죽음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 앞에서는 절망을 모르면서, 육신의 죽음 앞에서는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육신의 죽음을 뛰어 넘는 다른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곧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죽음을 이기게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영원한 생명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 덤덤하게 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제로 하는 성경 얘기는 항상 부활의 능력이신 예수님께 마음이 있지 않는 사람들은 끼어들 수없는, 오직 그리스도께 모든 마음이 향해 있는 신자들만의 대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주제, 즉 교회나 세상에 가치관을 둔 사람들의 얘기에 그리스인은 도무지 끼어들 수 없게 됩니다. 듣고 있으면 구역질만 날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화평과 거룩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교회만 열심히 다니고 성경보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 잘하면 천국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천국에는 가도 주는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를 볼 수 없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지옥뿐입니다. 결국 화평과 거룩이 없이는 멸망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도 믿어야 하고 또 화평과 거룩도 좇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화평과 거룩을 좇는 것 자체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화평과 거룩이 믿음의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화평과 거룩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화평과 거룩을 좇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화평을 인간관계에서의 화목으로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화평은 화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을 화목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결국 화목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고 화목하지 못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그들만의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모두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이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필히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인해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심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에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은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피로써 화평을 이루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의 피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악함을 바라보며 애통해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 있는 자신을 보는 사람들이고, 그것이 곧 영원히 비참한 처지로 끝날 멸망임을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만이 화평을 이루신 예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화평을 이렇게 이해해 본다면 화평을 좇으라는 것은 화목해져라는 의미가 아니라 화목제물로 오셔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을 좇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해질 것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거룩할 수 없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예수님의 의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의를 믿을 때 예수님의 의로우심 안에서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의 활동이 거룩한 것이고, 예수님의 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을 두고 거룩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있게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주를 좇지 않는다면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주가 아닙니다. 내가 주라고 일컫는다고 해서 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보내신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신 주가 되시기 때문에 주를 좇는 문제에서는 항상 주의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라는 말을 하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즉 주를 좇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홀로 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개인이 없습니다. 몸의 관계 안에서 지체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주의 성전이면 함께 하는 지체 역시 주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는 그리스도를 좇는 일에 있어서 서로 유익을 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항상 화평과 거룩을 밀쳐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포기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감사에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