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강) 히브리서 12:15-17 돌아보는 관계

<본문>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브리서 12:15-17)

<설교>

인간이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몸보다는 자신의 몸을 돌보고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은 일을 두고 추궁하셨을 때에,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말하는 것에서 나타난 것처럼 사단으로 인해서 인간이 배우게 된 것은 자신을 위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것이고 가치 있는 것임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은 소위 신앙 안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개인 구원의 용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나의 잘됨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두려움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이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내가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우리 자신들도 이기적인 신앙에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기적인 신앙에 머물고 있는 우리들에게 본문에서 말하는 두려움은 사실 쉽게 와 닿지 않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보면 세 가지의 두려움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괴로움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장자의 명문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들 두려움은 내가 그렇게 될까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그렇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해로움을 감지했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과 연관이 없는 일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에 이르지 못하든, 더러움을 입든, 망령되이 행하든, 그래서 그 결과가 지옥에 가는 것이든 그 모든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타인이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지옥 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누구나 가질 수 있기에 타인의 신앙 문제를 두고 내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주 생소한 것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두려워하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왜 이런 두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까?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자된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신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까? 엡 4:1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엡 1:4-6절에서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말합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뜻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베푸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내가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면 되겠구나.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로 하나님 앞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부르신 개개인 한 사람에게서 영광의 찬미를 받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영광의 찬미를 받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엡 4:1-3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행함을 서로 겸손과 온유로 대하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흠 있는 우리를 흠 없다 하신 것입니다. 더러운 우리를 거룩하다 하신 것입니다. 죄 있는 우리를 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은혜를 찬미하는 것이 될까요?

사도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관계로 부름 받은 지체가 서로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거저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라는 말로는 안되는 것일까요? 물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든지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온유와 겸손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은혜에 대해 고백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온유와 겸손이 드러나지 않고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시기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은혜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그 실체가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라는 개인적 주체가 인정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나’ ‘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체’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체는 서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몸이라는 관계에서 ‘하나’라는 의미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었는가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의 찬미는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이르지 못한 자가 있을 때, 그를 잘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은혜에 이르지 못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붙드시고 이끌어 가심으로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그 은혜로 형제를 바라본다면 은혜에 이르지 못한 형제가 있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워지고 망령되이 행하는 모든 것이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로만 여겨진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교회는 서로의 신앙을 비교하고 경쟁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보다 더 나은 신앙을 갖추는 데만 열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열심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런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신앙에서도 타인을 이겨보려는 습성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이 은혜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겠습니까? 결국 나만 잘하면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종교적 욕망으로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한낱 종교인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는 맞았고 너는 틀렸다’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틀린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를 누르고자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틀린 자가 있을 때 그의 틀린 것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나와 함께 하는 형제가 나의 잘못됨을 드러내는 계시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틀렸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적하여 드러내는 일에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에 이르지 못하고 더러움을 입고 망령되이 행하는 그 모든 것도 남의 일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은혜에 이르렀는데 너는 은혜에 이르지 못했다’는 시각에서는 판단이 나타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잘난 자가 없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범죄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보다 더 나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럴 때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게 될 것이고, 형제가 은혜에 이르지 못하고 더러움을 입고 망령되이 행하는 것에 두려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