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강) 히브리서 12:25-29 소멸하는 불

<본문>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브리서 12:25-29)

<설교>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경고는 그냥 엄포가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어떤 운명과 현실에 처하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참된 현실인 것입니다. ‘살았다 하나 죽은 것’,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외면하고 산다기보다는 아예 그러한 인간의 현실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현실을 얘기하면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죽음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얼마든지 인정을 하지만, 영원한 죽음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이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죽음은 실제적으로 겪는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기에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만큼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신자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원한 죽음을 깨달은 사람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영원한 죽음이라는 인간의 현실에 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의 현실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불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시내산에 강림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인간은 심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께 나아갈 수 없는 비거룩의 자기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시온산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시온산에는 새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에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무서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모두 담당하신 희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있는 시온산이 이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인한 새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 살아난 새 생명의 현실이 참된 것임을 알게 된 신자라면 보이는 세상의 것은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새 생명의 세계를 제외한 모든 것은 심판의 대상에 불과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새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고 산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담겨 있는 뜻과 마음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새 생명의 세계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라는 말을 합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자, 즉 모세의 경고를 거역한 자들이 진노를 피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거역한다면 어찌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경고를 거역한다는 것은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향해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을 죽이시는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스스로 진노를 자초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사건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자체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죄 자체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시내산에 불로서 강림하신 하나님에 대해 무서움과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노와 무서움을 보지를 못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부어져야 할 진노와 심판을 홀로 짊어지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가치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소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심각한 현실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는 것에 대해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면서도 그 모든 일을 일으키며 세상을 향해 심판을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외침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멸해 버리시는 하나님 앞에 잘난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세상에서 잘나고 높아봐야 모두 무너지고 소멸될 것에 불과할 뿐인데, 소멸하시겠다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를 쓰고 기도하는 것은 또 뭡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기에 그런 모습만 보일까요?

소멸의 대상에는 우리 역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무엇으로도, 우리의 착함과 선행과 열심 등 그 무엇으로도 모든 것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불을 극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소멸하시는 세상에서 우리를 끄집어 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피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의 세계에서 건지셔서 피의 세계로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안다면 어찌 우리가 이른 피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를 보호하시는 피로 인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멸의 세계인 불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피의 세계로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과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희망한 세계도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이른 세계도 아닙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에 의해 되어진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피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인한 새 생명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26-28절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하나님은 땅과 하늘을 진동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진동해 버리시는 것은 진동치 아니하는 나를 영원히 남기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받은 나라가 바로 진동치 못할 나라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계속될 나라에 소속된 자로 새롭게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과연 무엇으로 기뻐하겠습니까? 세상의 참된 현실과 실체를 바라본다면 세상의 것이 기쁨의 조건이 되지 못함은 분명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결국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영존하는 것만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희미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여전히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과 실체를 소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서 보이는 것만을 참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르게 하신 피의 세계를 아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은혜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믿지 않는 것을 믿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분명 그 뜻은 우리에게서 성취되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