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강) 히브리서 13:1-3 형제 사랑

<본문>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히브리서 13:1-3)

<설교>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하는 어떤 것이라도 ‘이것은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빼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인간의 출발은 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는 전혀 무능력한 존재로 출발한다면 성경의 어떤 말씀도 마음만 먹으면, 의지만 있으면 실천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접근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실천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만약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그 역시 인간의 열심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 인간의 열심이 보태어져서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문을 본다면 본문의 내용이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절을 보면서 ‘형제를 사랑하자’, 2절을 보면서 ‘손님을 대접하자’, 3절을 보면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자’라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12:28-29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소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면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자라는 말을 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사랑과 손님 대접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았으니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증거하고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은혜가 형제 사랑으로, 손님 대접으로,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는 은혜를 안다’라는 말이나 ‘나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하려거든 자신에게서 사랑과 대접과 용서 등의 모습이 보이는가를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은 자신을 포기할 때 보이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 등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도와주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해와 번거로움이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가 이미 자신을 포기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손해와 번거로움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을 전제한 행동인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 자신을 포기한 자로 살기를 원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으로 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형제 사랑이 나를 포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자신을 포기한 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물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도, 크게 되는 것도 아니고 손해 보는 길이고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1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말하는 것은 형제 사랑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세상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손님 대접 역시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 대접도 예수님의 대접을 받은 자에게서 보일 모습이기 때문에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의롭게 하시는 대접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대접이 우리를 강권해서 대접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편에 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는 달라야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산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분명히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나만 사랑하는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나만 사랑하고자 하는 본성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에 그 순간에는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내가 원하고 내 이익만을 추구하는 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손해가 되고 번거로움이 된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분명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툼과 분노 시기, 이러한 모든 것은 분명 은혜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서는 여전히 다툼과 분노와 시기가 나타납니다.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소원합니까? 다툼이 있고 시기가 있고 사랑이 없는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고, 혼인을 귀히 여기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만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내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사랑에 파묻힌 자신을 미워하기에 그런 나를 다스리시고 징계해서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기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기도는 다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소원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소원 역시 다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소원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과연 누구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되는 것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신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세상 속의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자신입니까? 세상에서 어떤 인간이 되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산다면 그의 마지막은 성경이 언급한대로 소멸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심판이 전부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부자로 살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나사로로 살기를 원합니까? 비록 거지라 해도 그 마지막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세상에서의 자신을 포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나에게서 포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소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