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강) 히브리서 13:4-6 신자의 삶

<본문>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브리서 13:4-6)

<설교>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수준을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하고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나올 수 없음을 잘아시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길 수는 없습니다. 고통당하는 자를 볼 때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잠시 가질 수가 있지만 타인의 큰 고통보다는 자신의 작은 고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학대 받는 것을 자신이 학대 받는 것처럼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4절을 보면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는 말을 하는데,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는 것은 간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과연 누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5절에서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돈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돈을 힘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지요.

사람에게는 각자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은 돈이 있어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돈을 주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돈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는 돈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돈을 사랑하지 않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힘으로 여기며 있는 자를 족한 줄로 알고 살아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다는 것을 아시면서 ‘사랑하라’ ‘대접하라’ ‘혼인을 귀히 여기라’ ‘돈을 사랑치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할 수 없음을 아시면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은 순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자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서라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면 하나님이 말씀한 모습들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들을 인간이 실천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말씀에 대한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질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게 능력만 받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자기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더러 저리로 옮겨지라고 명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능력만 받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능력 받으면 된다’라고 여긴다면 지금껏 능력 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는 증거밖에 안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산을 옮기는 기적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능력을 달라고만 외쳐댔지 받은 적은 없다는 얘기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을 옮길 필요가 있어서 하나님이 하신다면 산은 옮겨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을 세우시고 산을 옮길 것을 명하신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한다면 산이 옮겨지는 것도, 뽕나무가 뽑혀 바다로 심기는 것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되는 것이지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받아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뜻을 세우시고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나를 붙드시고 다스리실 때 그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도구로 부름을 받은 자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관계에 있는 것이 곧 ‘믿음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까지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면서 새롭게 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드시고,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는 수단과 도구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세상에 나타내시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뜻을 세우신다면 우리로 하여금 산을 명하여 옮기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라지게 한 것도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겠다는 뜻을 세우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홍해를 가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고침 받고 믿음이 주어져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되는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성취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대접하라, 혼인을 귀히 여기라, 돈을 사랑치 말라는 말들은 우리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뜻을 세우시고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임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산도 옮길 것인데 하나님이 너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뜻을 알았다면 ‘예,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소망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잘사는 것에 관심을 둔 채 ‘복 주십시오’라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살겠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고 말합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라는 말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는 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 자기 뜻, 즉 자신의 원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기만을 소원할 뿐입니다. 주는 이러한 신자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즉 내가 세운 내 뜻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무엇도 두려워 할 것이 없이 주만 믿으면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나를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면 ‘나를 징계하시고 때려서라도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소원하면서 주를 바라보는 것이 순종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주는 신자의 이러한 소원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항상 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고치시면서 형제 사랑이 가능하게 하시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시고 혼인을 귀히 여기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을 받아서 위대한 일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뜻을 세우셨으니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하셨으면,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으면 항상 감사하는 자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취되도록 주님이 날마다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순종하고자 하는 신자에게서 자기 뜻을 내어 놓으며 ‘이루어 달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