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3:16-17)
<설교>
13,14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신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는데, 신자란 영문 밖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문 안에서 영문 밖의 예수를 부르면서 ‘나를 도와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고 말입니다.
참된 신자는 지금 자신이 있는 영문 안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떠나는 사람입니다. 영문 안에서 부지런히 일해서 자랑거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는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세상에 머물러서 신앙생활하며 살다가 천국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떠나라는 말조차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자살하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 다 버린 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등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 마음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삶의 이유와 목적으로 삼는 것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바울처럼 세상이 자랑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것을 뜻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나에게 소중한 분이 누구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입으로 예수를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더러운 개똥도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고, 그때 개똥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데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출세하고 성공하는데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세상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인기가 없습니다. 인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보다는 세상의 복을 준다고 외치는 다른 예수가 더 인기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보다는 세상의 복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좋고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똥을 약에 쓸려고 찾는다면 그것은 개똥이 필요한 병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즉 개똥이 필요한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 개똥이란 아무짝에 쓸모없는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 얘기를 개똥에 비유하며 말씀드리는 것이 좀 그렇지만 세상은 예수님은 그 정도로 하찮게 취급한다는 점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필요한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사망이라는 엄청난 병에 걸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끊임없이 세상이 걸려있는 병이 어떤 것인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병든 상태를 깨닫게 함으로써 유일한 치료자이신 예수님께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16절의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는 구절도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일단 선을 행하라는 것이나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는 것을 실천의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실천을 가지고 해결될 영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적인 문제가 인간의 실천으로 해결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실천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실천하는 나를 기쁘게 보시고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은 단지 기독교의 상징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분명 실천을 의미하는 말씀 같은데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니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이 선을 행하는 실천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서로 나눠주는 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선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서로 나눠주는 것도 여러분이 아무리 실천을 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전부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결국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을 믿음으로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으며, 서로 나눠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믿음만이 참된 것이고, 자기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 사랑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믿음과 사랑만이 참되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를 살리신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병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서는 참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믿음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떠나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병을 알았기에 자연히 예수님의 가치와 귀함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필요할 수밖에 없기에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예수님이 죽으신 그곳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가 선이라는 실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나눈다는 것도 아무 쓸모가 없는 날 위해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마음으로 형제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형제가 어려울 때 자연스럽게 돕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도우면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니까, 선을 행해야 하니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자기 스스로 선한 실천을 만들어 내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사랑하자 마음먹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희생하자 마음먹고 희생하는 것도 역시 희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희생, 섬김, 구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신자로 살아가는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붙들어 인도하시는 인도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인도자는 내 영혼을 위해 나를 대신해 회계할 자인 것처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도자에게는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인도자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영적인 것에 모든 가치를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자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인도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인도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형제를 돕고 인도하는 그 모든 일들이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이루시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서로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말씀에만 모든 관심이 있게 되면 자신에 대해서도 형제에 대해서도 오직 영혼의 문제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서로가 인도자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