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히브리서 2:14-18 혈육에 함께 속하심

<본문>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브리서 2:14-18)

<설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선 내 문제가 크고 급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타인의 사정과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큰 문제가 자신의 작은 문제보다 크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우리가 항상 자신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입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신앙은 우리의 입장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선포하고 주님의 입장만을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때문에 신앙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단순히 교회 출석하고 교회 행사에 참석해주고 가끔 노력 봉사해주고 헌금하는 것으로 충분히 채워지는 것이라면 누가 신앙을 어렵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은 우리의 입장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길을 우리 스스로 갈 수 있다는 것은 교만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내가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실수와 허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마냥 가벼운 상태 그대로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나 때문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나로 인해서 죽으셨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또는 애통함이 전혀 없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문제를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나 때문에 피흘려 죽으신 십자가 아래 나와서 그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 과연 가하다고 여기십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나 때문이다’는 말을 입술에만 달고 살았을 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타인의 일로 여겨버리고 무관심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무관심을 보이다면 그것은 우리의 큰문제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있습니다. 죽음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공포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생존에 있습니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자연히 죽음에 대해서는 공포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해방된 자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세상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세상을 떠나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뒤에는 예수님이 가신 곳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도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일생에 대해 자유로운 분들이었습니다. 가벼움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은 고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바울에게 짐으로 다가오지를 않았습니다. 천국이 있었기에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았기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의 마음은 가벼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것으로 행복을 찾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그 심령에 채워짐으로 자연히 발생되는 기쁨이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울 것은 죽음이 올 때 그냥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기에 그냥 떠나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에게도 돌아갈 곳이 마련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떠났을 때 갈 곳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비할 바 없는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영원히 거한다는 이 사실이 신앙이 되어 우리의 심령에 자리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돌아갈 곳이 없는 자는 지금 거하고 있는 곳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현세를 떠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 두려움으로 일생에 종 노릇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가본적도 없고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천국을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심없이 흔들림이 없이 그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의심을 없게 하고 오직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으로 일생의 막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서의 영원한 삶의 막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죄인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혈육에 속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우리와 함께 혈육에 속하기 위해 육신으로 오신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고 육신의 몸을 가진 분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갈 길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거친 후에는 부활이 있고 영원한 하늘에서 거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 축복을 소망하기에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멀리 있는 일 아니라 항상 코앞에 달고 다니는 일로 여겨야 합니다. 당장 일초 후의 일이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준비하는 자로 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신 곳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18절에서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고난은 고통의 의미가 강할 것입니다. 외부적인 핍박이나 물리적인 고통이 가해지는 것을 고난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유대인들에게 붙들려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한정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내용을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핍박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대화만 주고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을 두고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말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것이 왜 고난입니까?

그러나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싸움이었습니다. 온 우주와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싸우는 싸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떡과 말씀을 두고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엄청난 갈등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떡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영광을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말씀으로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안에서 커다란 충돌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주체할 수 없는 엄청난 갈등인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마귀로부터 이러한 시험을 받으면서 항상 갈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음 이후를 보라는 것입니다. 일생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돌아 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와 같은 혈육에 속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은혜는 참으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가신 그 길, 그 곳을 바라보며 여러분의 소망으로 굳건히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이 소망이 죽음의 두려움에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승리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유를 얻게 할 것입니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은 천국을 알았을 때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항상 갈등에 머물러 살아가는 우리가 죽음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성령으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 없이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곳이 여러분의 소망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동하게 하지만 하늘에 대한 소망과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