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히브리서 13:18-19)
<설교>
사람이 신앙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쨌든 자기 유익이라는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신을 믿으면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에서, 어쩌면 좀 더 고급한 삶을 위해서 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에게 국한 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도 결국 자신을 위해 자신을 문제를 신에게 내어 놓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18,19절)고 말합니다. 사도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사도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의 연약성을 인정하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즉 ‘나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연약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됨을 믿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은, 사도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목사가 성도들에게 ‘목사를 위해 기도해주세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대부분은 목사가 능력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건강하기 위해서, 목사가 목회를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국한된 경우가 많습니다. 즉 목사 자신이 능력이 있고 성공하는 목사가 되기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목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함으로써 성도는 목사를 위해 존재하고 목사를 섬겨야 하는 것임을 암중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도로서 목사를 사랑하라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목사가 성도에게 목사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그것은 목사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차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목사라고 해도 믿음이 나은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 존재일 뿐임을 내어 놓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도가 자신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연약함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부탁하는 기도의 내용은 성도들에게로 속히 돌아가기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가 성도들에게 속히 돌아가고자 한 것은 그들 속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 것이지 굳이 기도를 부탁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선하게 행하는 것 자체가 사도 자신에게 속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선에 거하고 또한 선하게 행하게 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임을 알았기에 이 모든 것을 두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선한 행위를 하고자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는 선한 행위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어서 선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하지 못한 우리에게서 선한 행위가 보인다면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선하지 못한 자에게서 선한 행위가 보인다면 그 행위는 분명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나의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무엇으로부터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신자는 성령에 감동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란 성령에 감동되어 살아가는 신자에게 맺어지는 성령의 활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열매이며, 따라서 나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을 두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세워서 무엇인가를 하시고자 하는 뜻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고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선한 일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나타내고자 속히 돌아가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가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자신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자이니 하나님의 선한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기도는 온통 나의 욕망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세우고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가 서로 기도한다는 것도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서 어렵고 힘든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서로가 서로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하셨는데, 예수님의 기도에는 그 어디에도 자신의 뜻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이 사라짐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부릅니다. 무엇을 위해 부릅니까? 날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기도가 아니란 것입니다.
신자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내 뜻은 상관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라는 의미에서 부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자로서 정당한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뜻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관심이 내 뜻과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는 우리의 뜻과 소원이 전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히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그 뜻대로 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자신의 연약함을 아십니까? 우리가 서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안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기도를 부탁하겠습니까? ‘연약한 내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는 부탁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서로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기도는 이 땅에 붙어 있기 위한 욕망이라고 한다면 신자의 기도는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에는 출애굽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난 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참된 성도의 기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참여되는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 저로 하여금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에 동참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의 세계에 동참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의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 서로가 기도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은 가볍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주님의 십자가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라면 욥이 당한 재앙까지도 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의미까지 포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선하게 행하고자 하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마음은 선을 원하는데 몸은 항상 악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나를 두고 한탄하는 것도 없고 기도하는 것도 없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참된 신자로 살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야 말로 내 뜻을 무너뜨리고 포기하는 것이기에 진땀나는 기도이며 나의 본성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이 기도가 나와진다면 그것은 그에게 선한 양심이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