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강) 히브리서 13:20-25 예수 그리스도

<본문>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히브리서 13:20-25)

<설교>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설교하면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 위한 방법을 얘기한 적이 없고, 소위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이 실천해야 할 덕목에 대해서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이 우리의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리스도만을 계속 들어왔기에 설교가 지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말을 또 듣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매주 그리스도를 얘기하는 저는 지루하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께 그리스도를 얘기하기 전 항상 먼저 저에게 있는 탐욕과 엉뚱한 관심이 들통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늘 저에게는 새로운 분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반복되는 말에서도 새로운 분으로 저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살펴오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악한 나를 용서하며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새롭고 놀라운 은혜 말입니다.

이 은혜는 구약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붙들어 인도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믿음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온 것이었음을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믿음의 여부에 관심을 두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다스리고 고치면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 1:1-2절의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는 구절을 보면 히브리서의 시작이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를 세워서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기적과 사건으로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께 있을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채 말씀하시는데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과 관심이 나를 향한 채 말씀을 듣는다면 결국 말씀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관심을 둔 채 예수님을 찾는다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돕는다고 하는 다른 예수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되는 것입니다.

20-21절을 보면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양의 큰 목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큰 목자고 목사는 작은 목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양을 인도할 크신 목자이지 예수님 외에 다른 목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도하는 자란 목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씀으로 다른 자들을 인도하고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것이 나의 의지와 열심으로 이루는 일이 아니라 큰 목자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끌림 받는 신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러분이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힘을 쓰고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으로 인해 근심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뜻을 두시고 행하고 계신 결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행함으로 인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에 ‘내가 저 사람을 전도해서 믿게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에게 뜻을 두고 행하시는 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구원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구원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의한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구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즐거움을 자기 백성들 속에 이루심으로써 그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그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전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일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모두 이루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건설하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잘 만들었다’ ‘좋다’라고 하면 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에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길에 서서 빛으로 생명의 길로 오신 그리스도를 감사하고 높이는 것이 뜻에 행하는 것이 됩니다

23-25절에서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라고 말하는데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가 형제 디모데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만나고 싶은 심정을 말하는 것은, 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짐으로 선한 일이 온전케 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것이고 선한 일이 온전케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모이고 만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만남에 그리스도가 없고 진리가 없다면 그냥 사람의 만남이고 친목일 뿐이지만, 그리스도가 있고 은혜를 나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한 뜻을 이루시는 일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행하게 하고 말하게 하면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뜻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믿음에 의해 자신의 뜻이 무너지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의의 세계로 부르신 것은 예수님으로 주어진 복을 세상에 증거하고자 하시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게 되고 신자들이 출현하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새로운 소유물을 생산한 결과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의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 사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그 뜻에 그대로 행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