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히브리서 3:1-6 집 맡은 아들과 집

<본문>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브리서 3:1-6)

<설교>

히브리서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신자의 힘과 위로와 소망은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아는 앎이 우리에게 위로로, 힘으로, 담대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복으로 삼아 위로와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믿음과 상관없이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을 말하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의 위로와 기쁨은 전혀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혈육에 속하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이 모든 일들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니 만큼 어떤 고난에서도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고난과 어려움을 거두시고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이 전혀 알 수 없는 예수님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역시 고난과 어려움에 있는 신자를 위로하고 돕는 내용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는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이 신분은 환경과 형편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영원불변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부르신 거룩한 존재를 왜 고난과 어려움에 있게 하시고 실패도 안겨주시는 것입니까? 출애굽기를 보면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이스라엘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편히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유리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이스라엘도 분명 하나님이 애굽에서 불러내신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왜 40년의 세월을 떠돌아다니게 하시는 것입니까?

신명기 8;2-3절의 내용을 보면 40년의 세월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가르침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여러분에게 있는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모두 거두시고 편안한 삶을 살게 하시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에서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지혜를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과 핍박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그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함으로써 위로를 받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원하는 대로 뭐든 들어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을 때는 가르치고 야단치면서 바른 길을 가도록 힘쓰는 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부모의 마음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다스리며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시 49:14절에 보면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인이 자기 자식을 잊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잊는 일은 없을 정도로 신자는 하나님께 기억된바 되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백성을 흔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절부터 보면 예수님이 일하신 것을 모세가 일한 것과 비교하며 말씀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일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점이라면 모세는 주인의 종, 즉 사환의 입장에서 일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주인의 입장에서 일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그의 집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집 맡은 아들과 집, 이것이 신자와 예수님의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출하셨습니다. 지나가시다가 우연히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준 차원이 아닙니다. 살려주고 나서 단지 기억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출한 자기 백성을 계속해서 도우시고 살피시면서 신자로 살아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집을 맡았다면 그 집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잘 보전되도록 힘을 쓰고 관리할 것입니다. 신자가 바로 예수님의 관리를 받는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우리에게 처해진 환경과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을 외면하기도 하고, 불신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육신의 편함을 제공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미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지 내가 놓여 있는 세상에서의 형편을 둘러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생존한 기간 안에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생존이 끝나는 것이 곧 고난의 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가 시작되어 계속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절대로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보다 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삶이 신자에게는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여러분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에 있을 때 여러분의 자랑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맡으신 집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천사보다 존귀하다고 했습니다. 존귀함의 의미를 세상 것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나라에 거하는 것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들이 바로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은 분명 복받은 자들입니다. 이 복이 여러분께 크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어려울 때 힘이 되지 못하고, 힘들때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집 맡은 아들로서 집을 지키시고 도우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홀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리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을 아십니까?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육신은 비록 고난과 어려움에 있다 해도 그 심령은 구름을 타듯 가벼울 것입니다. 이처럼 가벼운 심령으로 살게 하는 신앙생활을 누려보고 싶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