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1:1-5 부활 후

사도행전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없는 이적의 사건들이 많이 등장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행하는 신비한 이적들에게 사도행전의 중심을 두기도 합니다. 즉 성령이 역사 한다면 사도행전에서처럼 능력의 이적이 있어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굳이 성령행전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지만 성령행전이란 성령이 일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지 성령을 받아서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것이 곧 사도행전을 크게 오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행전을 읽으면서 조심해야 할 부분은 사도들이 행한 이적 자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어떤 기적을 행하고 승리를 이루었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사도 행전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행전은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세상에 세우신 사도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즉 예수님은 비록 하늘로 가셨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로 인해서 예수님의 시대가 계속 이어져 감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사도행전에서의 사도들의 사역은 사도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계속된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행전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는 누가며,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면 사도행전은 분명 누가 복음과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1-2절을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1:3절에서 데오빌로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 데오빌로에게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내가 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을 기록하였고, 두 번째 글에서는 예수님이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신 일을 기록하였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시는 일에 대한 글이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합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들에게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오늘날까지 진행되느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마가복음은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고 계속해서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면 예수님의 일은 여전히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즉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이나 사도들의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이 사도들을 세워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일을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 오후에 마가복음을 공부하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마치 옛날에 있었던 위인전을 대하는 것처럼, 어떤 한 위인이 영웅다운 삶을 살다가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갔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린 대개 부활로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끝난 것으로 인식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시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6장은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20절)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아무래도 한 권의 성경이 끝나는 마지막의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마가는 부활하신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있음을 말하고 마가복음을 끝낸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함께 하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연결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믿었다는 것으로 완성된 것이 아님이 명백해집니다. 믿음은 시작이라는 말을 여러번 했습니다. 믿음이 왜 시작입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믿음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믿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이 멀어져 있기 때문에 믿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을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을 주신 분의 뜻에 대해서는 도외시 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분부하기를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4-5절)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을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때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을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제자로 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성령 받은 것을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주는 증표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증거로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성령을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을 자기 유익을 위한 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그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래 자녀가 아니었던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지 우리를 자녀로 삼아서 세상에서 잘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40일간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냥 데려가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은, 이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제자들이지만,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붙드십니다. 그것이 성령 세례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제자들을 붙드시고,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함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계속 되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결코 신자로 하여금 죽어도 다시 산다는 소망을 갖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 받는 것을 원합니다. 성령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으면 자신의 구원이 확실시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신분이 확실히 되며 하나님의 더욱 큰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성령을 받은 모습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보여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그 마음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5절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신비한 능력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붙들린 인생입니다. 이제는 자기 인생이 없고 예수님이 가신 길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을 뒤바뀐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 역시 성령이 함께 한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세례 받은 자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신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하늘로 들어가신 것처럼 성령으로 살게 된 신자 역시 그 마지막은 하늘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소망인 것입니다.

성령의 증거는 신비한 현상이 아닙니다. 방언도 아닙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증거는 관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관심이 뒤바뀌게 됩니다. 내 일에서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내가 가야할 길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내 길로 받아들입니다. 나를 나타내고 나를 내세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자랑하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일에 매달려서 걱정하고 근심하고 울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자녀로 삼으신 이유가 아닙니다.

성령 받은 신자가 할 일은 오직 예수님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에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마시고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삶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천국이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