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2:37-41 회개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서 삼천명이 회개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의 설교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본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삼천 명이라는 수에 관심 둘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설교를 두고 생각한다면 사실 베드로가 설교를 잘했기 때문에 삼천 명이 회개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삼천 명의 회개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한 결과라면 베드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설교에도 같은 반응이 나와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에는 베드로말고 스데반의 설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는커녕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스데반의 설교가 베드로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를 잘해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회개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한 것 역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결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설교한 베드로나 회개한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의미를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회개를 하면 회개를 한 그 사람을 높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굳이 회개를 두고 말하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을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당사자를 생각합니다. 봉사하면 봉사하게 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삼천 명의 회개가 어디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까? 베드로의 설교입니까? 아니면 회개한 사람들의 자질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복음서의 얘기는 하나같이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고 가르쳤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끝납니다. 누구하나 예수님 말씀에서 스스로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계셨던 세상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뭔가 달라진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을 가르쳐도 반응하지 않던 세상이 사도가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심으로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그 누구로부터 어떤 말을 듣는다 할지라도 반응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달려들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들의 실수와 허물을 발견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성령이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성령의 간섭을 받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간섭하시는 새로운 세상은 우리의 힘과 자질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신자로서 이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간섭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며 하늘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는 곧 말씀에 대한 굴복입니다. 즉 삼천 명의 회개는 베드로가 전한 그리스도 앞에서의 굴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굴복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8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치 구원이 우리의 회개로 시작하여 세례 받는 것으로 이어지고 죄사함 받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구원의 조건은 회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죄사함 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말도 하게 됩니다.

회개가 성령을 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도 회개는 가능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구원은 인간이 회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 되버립니다.

회개는 분명 성령이 오셔서 일하신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8절의 말씀은 회개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서 그가 성령을 선물을 받았고 죄사함 받은 자임이 증거 되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성령 받았다고 외친들 그것을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이 오셨다면 오신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에 의해서 마음이 찔림을 받고 회개하게 된 것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세례 역시도 의식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는 바로 나라는 고백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살아가는 길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다른 길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세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신자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에는 회개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용서해 달라고 울면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회개를 하지 못합니다.

회개는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진리임을 알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힘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사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회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