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0-32 바울에 대한 평가

<본문>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사도행전 26:30-32)

<설교>

현대 사회는 교회라는 기독교 단체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고 묻는다면 분명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와 목사에 대한 시선 역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 모든 목사에 대해 이러한 시선을 보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다수의 분위기가 이렇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교회답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현대 사회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대 사회에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사회에 잘보이고 좋은 평가를 받음으로서 교회에 득이 되기를 꾀하는 것도 많이 있겠지만 그것은 어쨌든 자기 이득을 위한 속셈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바르게 보이고 칭찬을 듣는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교회다움을 얘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집스럽게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교회가 행하고 추구하는 것 역시 오직 그리스도에게로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야 말로 교회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교회에서 돈 문제로 분란이 생기고,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분쟁하는 모습이 보여 지겠습니까? 오히려 양보해 버리고 지는 자로 살아가는 모습만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로서 착한 일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회다움에서 벗어난 채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탐욕에 머무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 힘쓰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다움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교회로서 교회다움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교회가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있어야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런 현실에서 본문의 바울의 얘기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30-31절을 보면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총독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왕과 총독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오히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나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려느냐’는 말을 할 뿐입니다. 바울의 말을 자신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려고 설득하는 말로만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총독은 사도 바울이 많은 학문으로 인해 미쳤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관심의 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도 바울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는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즉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의 평소 행위를 살핀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 보내어서 바울에 대해 알아오라고 지시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평가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바울에 대해 알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 불러 와서 바울의 말을 들은 적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만 듣고 바울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평가한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처럼 이들이 바울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처럼 무슨 악한 행사를 찾아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그립바 왕과 총독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에 많은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바울은 억울하게 붙들려 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자신을 심문하는 왕이나 총독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바울이 왕이나 총독에게 억울하다는 입장에서 감정적인 대립을 보였다면 그들은 바울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보일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바울의 생각입니다. 결론은 바울은 결코 자신의 현재 처지와 상황에 대해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로서는 모든 것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을 붙들어서 고소하고 로마 사람에게 넘겨준 것까지 하나님이 배후에서 하시는 일로 여겼기에 유대인들을 원망하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와 상황에서 모든 기회를 동원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었기에 자신을 심문하는 왕이나 총독에 대해 감정적인 대립을 보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나 총독이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왕이나 총독에게 잘보여서 풀려나려고 애를 쓴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평가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정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믿지 않은 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아부를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신앙으로 정당하게만 산다면 세상은 신자에게서 아무런 문제도 찾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신자이면서도 신앙으로 정당하게 살지를 못하고 자신의 유익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부정적인 평가만을 남기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는 세상과의 대립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와 세상은 대립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섞일 수 없고 타협하고 함께 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무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다름을 뜻하는 것이지 감정적인 대립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교회가 싸워야 할 것은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싸움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세상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듯 교회 역시 교회의 유익을 구하고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감정적인 대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인데 교회를 방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방해하는 사단이기 때문에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라면 과연 어떠했을까요?

현대 사회와 교회가 대립할 때 종종 발생하는 문제는 예배당 건축입니다. 현대 사회적 분위기는 내 집 옆에 예배당이 세워지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요란하고 시끄러운 관계로 교회 옆에 집 얻기를 꺼려함으로 인해서 집값이 하락한다는 것이 교회 건축을 반대하는 명분이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건축을 시작할 때 건축물이 예배당인 것을 감추기도 합니다. 건축이 진전이 되면 어쩔 수가 없을 것임을 노리는 것입니다. 아니면 정당하게 허가를 받았다고 하면서 법적 대응을 하기도 합니다. 공사를 불법으로 방해한 이유로 고소하기도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알기로는 주민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을 포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설사 포기한다고 해도 주민들의 세력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에 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경우 주민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만약 바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교회의 유익보다는 모든 기회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기회로 삼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세상이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26:16절에서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환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환이란 하찮은 심부름꾼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환이 주인 앞에서 자신의 이득을 구하고 꾀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환의 위치를 벗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환의 위치를 잘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득보다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사환으로 부르셨다면, 오늘날 신자 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증거할 사환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개인들이 이득을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되는 것인가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 진정한 사환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그를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한다고 열심이지만 그것이 어쩌면 자기 발로 여기저기 뛰어 다니면서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고 고기를 쫓아 버리면서 낚싯줄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싸움이 절대 아닙니다. 누군가를 찾아가서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좋지만 그 말을 하는 내 자신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거짓말 하는 것, 욕하는 것, 시기하는 것, 미워하는 것, 분쟁하는 것, 이런 것들에서 왜 벗어나야 합니까? 신자 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게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기 때문입니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은 어둠의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빛에 속한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빛에 속한 자의 모습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직하고 진실해야 하는 것은 신자라는 신분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다른 힘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힘에 굴복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짓을 행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신자를 정직하게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직하게 살면 사람들이 나를 신뢰할 것이고 그러면 내가 예수를 믿으라고 말할 때 내 말을 잘 들을 것이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가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착하게 산다고 해서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다만 신자니까 신자로서 정당하게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내가 정당하게 살아가지 않을 때 내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훼방자로 존재할 수 있음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혹시 나의 이런 행동으로 주님이 훼방을 받는 것은 아닌지 살피면서 증인답게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