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8 이달리야로 가는 바울

<본문>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사도행전 27:1-8)

<설교>

사람은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일에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치없는 일에 수고할 경우 자신의 수고도 가치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어떤 가치로 드러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습성이고 우리 역시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도 일의 가치를 따져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았을 때 자신의 가치가 향상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만한 일이라면 아낌없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수고와 행동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자로서 믿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에도 역시 수고와 인내가 요구됩니다. 하나같이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하지만 믿음 때문에 아낌없이 수고하고 인내하는 길을 가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과연 믿음 때문에 수고하고 인내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때문에 많은 수고를 하며 고난과 인내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그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물론 수고와 고난 자체가 기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 불쌍한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일에 자신이 하나님의 손길로 쓰임 받고 있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것이 수고와 인내의 보상이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기대하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내는 손길로 쓰임 받고 있는 것 자체를 감사하며 그것을 보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기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환경에 있게 된다 할지라도 불만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기쁨과 감사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어떤 상황도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갈 뿐입니다.

이러한 바울을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이 사형이나 결박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나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했기에 이달리야로 호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우리 기준에서 생각하면 ‘괜히 상소했다’는 후회가 있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상소를 하지 않았으면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이 역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 하나하나 성취되어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이 풀려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이 관심이었습니다. 이 관심이 여전히 죄수로 로마에 가는 것까지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바울의 믿음과 삶에 함께 하여 바울이 누렸던 감사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부르시고 나를 하나님의 손길로 사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관심을 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기쁨과 감사함을 이제는 다른 이에도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일 때 바울의 기쁨과 감사함을 함께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을 고난이고 고통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손길로 사용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까지도 하나님을 나타낼 도구로 주어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을 알려면 바울의 이러한 깨달음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로서 로마로 호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인생을 두고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까? 세상은 바울의 삶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예수 믿고 망했다’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신자가 자신의 일이 잘 안될 때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예수 믿더니 잘됐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믿고 망했다’는 평가를 들을까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존심입니다.

신자가 보여줘야 하는 것이 ‘예수 믿고 잘됐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울은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까? 세상 기준에서 본다면 바울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그 덕분에 망한 사람입니다. 잘된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죄수로서 끌려가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당당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에서 자신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볼 때 자신이 죄수로 붙들려 가는 그것도 형통일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로마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실패한 것이지만 하나님 기준에서 볼 때는 지극히 성공적으로 잘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평가하였기 때문에 억울함도 원망도 없고 오직 감사와 기쁨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이방인에게도 뭔가 다르게 보여 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로마 군대 백부장인 율리오란 사람이 바울에게 친절히 하고 배를 시돈에 대었을 때 친구를 만나라고 자유를 주기까지 한 것입니다. 죄수의 신분에 있는 바울을 이렇게 대우했다는 것은 그만큼 바울에 대한 신뢰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보고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신앙이 좋다는 칭찬과 평가를 교회로부터 받는다고 해도 해도 사회에서 욕을 먹는다면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잘한다’는 말을 듣는데 사회에서 욕을 먹는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사회로부터 욕을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욕을 먹는 정당치 못함이 무엇으로부터 인한 것인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보다는 오직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손길로 살아간다면 분명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열심히 전도한 것으로 증거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억울해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되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순종하는 온유함이기 때문입니다. 그 온유함이 곧 주님의 성품이었지 않습니까?

신자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대해 실패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욕심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신앙에 실패하게 하려고 합니다. 잘나 보이는 다른 사람을 동원하여 나의 현재의 삶에 대해 불만을 갖게 만들고 억울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것이 곧 신앙의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진정한 성공이고 실패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성공으로 여기는 것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바라보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을 묵상하시고 과연 바울의 삶을 실패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니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지 답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려진 답에 따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울의 성공의 삶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한다면 과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시고 여러분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치관에 대해 분명한 답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린 어쩌면 사도 바울 같이 위대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칭송을 받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신자로서의 인생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자의 삶의 가치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러 쓰시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이달리야로 인도하시듯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생각하십시오. 여기저기에 간증으로 삼을 수 있는 기적들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쁨과 감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성공한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