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1-28 삶의 가치

<본문>

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사도행전 28:11-28)

<설교>

특별한 사람은 특별한 일을 한다고 여기는 것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인생 또한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다면 그는 달리 내세울게 없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저나 여러분의 인생은 특별하지가 않고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에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각에는 신앙생활도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먼 외국의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는 선교사를 볼 때 그들은 나보다 특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비해 나는 너무 게으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끄러워하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기가 죽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신앙의 여정은 분명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겪지 않는 고통과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고 우리는 행하지 못한 기적들을 행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또한 많은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 우리의 삶은 그저 평범합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나에게 주어진 인생에서 내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의 모습을 비춰볼 때 사도 바울은 분명 특별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준으로 볼 때 그러한 시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시작할 때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업적을 소개하는 성경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계속 다스리시고 일하시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들은 단지 예수님의 일하심에 부름을 받아 나온 존재일 뿐입니다. 그들이 가는 것 행하는 것 모두가 예수님에 의해 되어진 것들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것 역시 예수님에 의해 되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의 삶은 결코 우리보다 특별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분들의 삶을 별것 아닌 것으로 평가절하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보지 말고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시라는 의도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의 삶은 생각하는 것처럼 하찮다거나 별 것 아닌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삶은 사도들의 그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능력을 행하는 것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어내는 삶이 되지도 못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도들의 업적에 비하면 우리의 업적이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보다 하찮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나보다 많은 일을 한 사람에 비해서 하찮게 여기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바울의 행적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8장은 사도행전의 마지막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결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로마에 호송되어 가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변명하고 로마 사람은 바울의 사상에 대해 듣기를 원하고 그리고 일자를 정하여 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였다는 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된 것은 바울이 원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 역시 바울을 로마로 가게 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로마로 갔으면 그 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뭔가 굉장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뜻하시고 풍랑 속에서도 바울을 살리신 것이 로마로 가게 하기 위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풍랑 속에서도 바울을 살리신 것이 로마로 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로마에서 큰 성과를 이루어 내는 것이 우리의 생각에 맞는 결과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24-25절에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는 이것이 복음을 전한 결과입니다. 그토록 원하고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 죄수가 되기까지 해서 오게 된 로마인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는 굉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26-27절을 보면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토록 고생해서 로마까지 가서 되어진 일이 무엇입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선지자의 말이 확인되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을 위해 사도 바울이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 로마에까지 온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바울은 죄수로서 로마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복음을 전함으로서 황제가 예수를 믿던가 아니면 장렬하게 순교하는 그러한 장면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성경은 바울이 가이사를 만나는 얘기 자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인생에는 우리가 볼 때 분명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도 그렇고 기적을 행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든 바울이나 우리나 예수님을 만난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뭔가 다른 방법, 특별해 보이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서 그가 특별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만난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떤 방법이나 체험에 관심을 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떻게 만났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났고 믿는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믿는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고 기적인 것이지 바울이 하늘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우리가 보기에 많은 일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뱀에게 물려도 죽지 않은 기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바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드러낸 하나님의 뜻일 뿐입니다. 풍랑에서도 죽지 않고 산 것 역시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바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특별하신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여러분을 세워서도 그 같은 능력을 보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여러분대로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에 성실하게 사는 것이 여러분의 본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께 특별한 결과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신자의 삶에는 특별한 결과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시각이 특별하게 보일 뿐입니다. 결과가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은 단지 주어진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여러분의 신앙은 나약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의 삶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다르지가 않는 것입니다. 젊기 때문에 가치 있고 나이 들었기 때문에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모두에게 각기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건강이 있고 힘이 있다면 건강과 힘으로 섬기고 봉사하면 됩니다. 나이 드신 분의 몫까지 담당하시면 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나이에 맞게 삶의 경험과 지혜로 젊은이들을 가르치면 됩니다.

현대 교회의 잘못된 점은 일하는 열심과 분량과 결과를 가지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교회에 쓸모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구분해 버리는 것이야 말로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을 교회가 차별하고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교회가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일을 하라고 하고 많이 봉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속셈은 교회의 발전과 부흥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가치는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신다면 그 삶이라 말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아무런 결과가 없더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결과는 여러분께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문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세상의 어둠의 상태를 드러내시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의식하지도 말도 결과를 생각하지도 말고 다만 믿음의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만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내세를 보여주는 것인가에만 집중하십시오. 이렇게 사신다면 그 누구도 여러분의 삶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결과를 보고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많은 일을 못한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으로 애통해 하십시오. 그리고 어디서든 여러분이 할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