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2:42-47 자유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서 3천 명이 회개한 것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3천 명의 회개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일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 대해 관심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서 보여진 것은 회개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시대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는 말을 합니다.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베푼 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성령이 일하시는 표적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설교는 베드로가 했으되 설교를 들은 자들을 회개케 한 것은 성령이 하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들로 인하여'라는 말은 사도들의 설교를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삼천 명이 회개하게 된 것 같이, 다른 사도들의 설교로 인해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사와 표적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기사와 표적'이라고 하면 불치병이 낫는 등의 신비스러운 일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43절에서 말하는 기사와 표적은 44-47절의 내용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물건을 통용하는 것, 재산을 나누는 것,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함께 음식을 먹는 것, 어찌보면 신비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일상생활들을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염두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기사와 표적의 의미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사건이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시대가 어떤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서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을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모습들은 무작정 현대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모본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가르치는 기사와 표적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대한 현대 교회의 입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아름다운 공동체, 또는 현재 교회가 지향하고 실천해야 할 모범적인 교회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의 모습에서 현대 교회가 무엇에서 잘못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고 배우는 것은 유익이 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준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초대교회로서 교회를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전도했다거나 선교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소유가 없는 자로서 함께 나누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은, 성령이 일하시는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소유가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적으로 자신의 소유로 가진 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있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하나님의 것으로 여겼으며 잠시 맡은 것이니 내것이 아닌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는 팔아서 나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를 본받자거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목사님들 또한 이 부분에서 참으로 난처해하기도 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은 목사들이 참으로 반기는 말이고,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 역시 교회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있는 재산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가진 것이 있는 자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만큼은 목사에게도 난처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현대인에게 재산을 팔아서 나눌 것을 강요하거나 명령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기사와 표적은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역시 현대 교회가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주어졌다기보다는 장차 미래에 주어질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미래를 지향하며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로서 자연히 그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희년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레25장). 희년이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이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음을 알게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희년에는 종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산 땅을 다시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18-19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곧 레위기에서 말하는 희년 사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 말할 때 누가복음의 희년 사상과 사도행전의 본문 내용이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서 자유를 전파하게 하셨다면,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초대교회가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는 육신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붙들린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자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잘아는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왔을 때 예수님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좇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 소유입니다. 자기 소유에 붙들려 있다면, 그래서 영생을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좇지 않았다면 결국 그 청년은 자기 소유에 붙들려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시작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곧 완벽한 자유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모습이 현세에서 보여지는 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는 결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교회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따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향하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증거 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시작된 초대교회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기사와 표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 교회는 모여서 교회 발전을 목표로 삼고 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게 하셨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초대교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삶으로 인해서 되어진 열매였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3-47)는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역시 교회로 모이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들의 목표를 가지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서 모이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성령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지 우리들이 스스로 교회의 목표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원하는 일이 곧 우리들의 목표와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큰 예배당과 많은 교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애쓰는 교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리고 분란과 다툼도 있고 경쟁도 있습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신자가 준비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흔적이 여러분의 삶에서 보여지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배워가면서 자유자의 신앙이 보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