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3:1-10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은 그 옛날 엘리야 선지자가 여러분 앞에 나타난다면 그에게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혹은 사도 바울이 나타난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분들이 능력의 선지자요 사도이기 때문에 병고침이나 아니면 여러분에게 득이 되는 어떤 일을 행해줄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기대가 그렇다면 과연 선지자나 사도들은 여러분의 기대에 맞는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힘쓸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선지자나 사도들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제가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의 말을 드리는 것은 성경에서 소개되고 있는 그분들을 볼 때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신 분들이 아니었고, 또 실제로 그분들은 그렇게 사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존재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관심은 그리스도에게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그분들의 사명이요 존재이유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들의 위대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적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적의 사건을 말씀드릴 때마다 제가 강조드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적을 행한 사람이나 이적의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적을 행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나도 능력을 받아서 저런 이적을 한번 행해 봤으면'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적의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며 '나에게도 저런 이적이 일어나서 병도 고쳐지고 돈방석에도 앉아 봤으면'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면 어떤 이적의 사건에서도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경에 대한 바른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두게 하는 분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6절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대하면서 '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말하면 뭔가 되어지겠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일종의 주문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외치면 죄를 이기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결코 그러한 용도로 쓰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아무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를 외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뭔가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단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의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이 일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존재할 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6절의 말을 하게 된 것은 성점에서 만난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은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아마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을 만나서 구걸을 하면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입장에서 거절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주일에 예배드리러 갈 때 좋은 일을 하면 왠지 복을 받을 것 같은 인간의 심리를 이용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앉은뱅이는 평소대로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합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앉은뱅이에게 6절의 말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이 내용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앉은뱅이의 처지를 본다면 2절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는 말씀과 같이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이고, 구걸을 하는 것조차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그는 돈이 필요할 때면 스스로 나가지 못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성전 문에 데려다 주기를 애타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그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하고 무능한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앉은뱅이의 처지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앉은뱅이의 모습에서 여러분 자신의 처지를 발견할 수 있고 스스로 그렇게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여러분 안에서 성공했으며 여러분은 참으로 희망이 있는 성도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목사인 저로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앉은뱅이는 바로 우리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돈에 대해서는 앉은뱅이와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는 죽은 자요 무능한 자요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처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일이 여러분 안에 시작되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앉은뱅이에게서 우리 자신의 처지를 볼 수 있다면 6절의 베드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돈을 구합니다. 그것은 앉은뱅이가 필요로 한 것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앉은뱅이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일어나 걷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를 일으켜 곧게 해달라'는 요구를 한다면 분명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권능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바라봅니다. 아마 그는 분명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말은 앞서 말한 대로 단순히 돈이 없다는 말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돈 대신에 병고침을 주는 결과가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일이 은과 금, 즉 세상의 재물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으로 되어지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은과 금이 있어서 수많은 은과 금을 준다고 해도 앉은뱅이는 여전히 앉은뱅이일 것입니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앉은뱅이라는 질고를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한 것은 너의 질고는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고침 받은 것은 단순한 병고침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예수님의 병고침은 곧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베드로가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의 베드로의 말은 단순한 주문형식의 말이 아니라 '연약하고 무능한 너를 일으켜 세울 분은 오직 너의 모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복음의 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앉은뱅이가 곧 우리의 처지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에 대해서는 스스로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담당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걷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내 힘으로 내 스스로 걷고 뛰는 것으로 착각함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사라지고 대신 우리 자신에 대한 자랑이 나오게 됩니다.

일어난 앉은뱅이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앉은뱅이의 처지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생명을 얻었고,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단지 말로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든 나올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은 그 은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을 본다면 베드로에게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분이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얻은 우리라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앉은뱅이가 모인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