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3:11-15 기적의 주체는

책에는 저자가 있고, 책의 내용에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따라 읽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바른 독서의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책이든 저자가 있고, 저자는 책을 읽을 사람들의 의도와 생각과 바램을 따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의도에 충실하여 글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성경 역시 같습니다. 성경에도 저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기록된 책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벗어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하신 것이 아님을 잊지 않는 것도 필요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 역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충실해야지 기적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욕구를 가지고 대한다면 단지 신비롭게 보이는 기적에 매달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은 사실 성경에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기적을 통해서 일하셨고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은 다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중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에 대해 신비성과 초월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즉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일 때 그것을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이 기적의 신비하고 초월적인 모습에 매료 되버립니다. 결국 기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히 가려진 채 다만 기적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기적만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애굽에 내려진 열 재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사건들은 단지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계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단지 초월성과 신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라면 다른 종교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기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가 더 센 신비와 초월을 보여주느냐로 우월을 판가름하는 분위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다른 종교에서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이 있다고 할 때 무턱대고 부정하려는 분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의 기적을 인정한다는 것이 마치 '네 종교가 내가 믿는 기독교보다 더 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초월적인 기적의 사건들이 기록된 것은 절대로 종교적 우월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기적을 종교적인 우월감을 드러내는 도구로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적의 사건 후에 있게 된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즉 기적을 목격했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을 말하면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분명 신비스러운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그러한 일을 행한 것으로 여겨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13절)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 끄집어내게 된 말은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장하신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앉은뱅이를 단지 병자라는 차원에서 보지말고 어떤 권세에 매어 있는 실체로 보자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됨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14절에서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는 말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은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주장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그 일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회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서 그분이 바로 생명의 주였음을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증거하고 말씀하고자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적은 단순히 신비스러운 일이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고 돌이키고 말씀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인 것입니다.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신 일임을 항상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해서 인간이 주체로 나서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결과가 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떤 태도를 보였겠습니까? 어쩌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대견한 생각을 잊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것은 좀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한 경우 앉은뱅이를 일으킨 놀라운 일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자신을 위대한 능력자로 내세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부터 모든 능력은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되심을 계시하기 위한 능력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시는 분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통해서 어떤 일에서든 사람이 주체로 등장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간증이라는 것의 오류도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간증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간증에서 인간이 그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간증의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한 한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그가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 이유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많이 들을 수 있는 간증 중에 죽을 병에 걸렸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체험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두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병이 나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기도를 어떻게 했다거나, 금식을 했다는 등의 자기 노력이 개입을 합니다. 그리고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모든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의 주장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 자체에 마음이 끌리게 되고 체험도 인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신비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만 보더라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길을 돌이킨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뜬 체험도 했고, 죽은 자를 살린 체험도 했고, 독사에 물렸는데 죽지 않은 체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삼층천의 신비로움을 체험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체험으로 따지자면 바울도 할말이 많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쓴 서신서를 대할 때 바울은 모든 성경을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쓰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설령 자기 체험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체험을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자기 체험을 언급하는 차원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체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라면 인간의 체험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처럼 나도 저런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누가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해도 담담할 수 있어야 하고, 설령 내 자신이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그 체험에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일하심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체험을 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힘이 될 수도 있고 감정적인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 사람은 자기 체험을 믿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체험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는 수준 낮은 것으로 여겨버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역시 '하나님은 그러한 체험을 주시는 분이다'라는 것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해서도 '내가 이렇게 했더니 이런 일이 있게 하셨다'는 생각에 머물 것이 아니라 '이 일의 주장자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하나님의 일의 증거일 뿐이다'는 생각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의 자리에 있다면 어떤 일도 내가 아닌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에게 주신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