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3:17-26 기적이 말하는 것

신앙생활은 말 그대로 신앙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교회와 연관된 일을 하는 것을 두고 '신앙생활'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신앙생활로 말씀하시느냐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은 신앙생활로 보지 않으시는데 우리들끼리 교회에서 하는 몇가지 행동들을 붙들고 그것을 신앙생활로 생각하고 만족하고 있다면 우린 그야말로 헛것을 붙들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종교적인 행동을 보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몇가지의 행동을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 못한다'로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해야지'라는 생각 역시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고 '내 삶은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신 분이 계신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신자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본문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린 몇주동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을 두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자신들을 주목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고 말한 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고 말한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성하게 한 것은 자신들의 권능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한 일임을 말함으로서 기적의 주체자가 자신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러한 말을 한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을 내세워서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이 기적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기적의 사건은 그냥 겉으로만 본다면 신기하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사람도 놀랍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기적을 놓고 '회개'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의 참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무작정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을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종합해 본다면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유대인들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즉 앉은뱅이의 상태가 바로 너희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스스로 자신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처량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을 낫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두고 스스로 일어나 걷는다고 여기는 유대인더러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앉은뱅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량한 존재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깨끗이 하고 성하게 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가 깨끗함을 입었음을 믿게 하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깨끗함을 입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 스스로 얼마든지 일어나 걷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믿어야 낫는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배척을 했고 죽였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우리 스스로 일어나 걷는다'는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은혜를 멸시한 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세상에 대한 영원전부터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만유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일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만유가 회복된다는 것은 악한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이 사건을 두고 만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시고자 하신다면 지금의 이 세상은 끝장나야 할 곳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 세상에서 지향하고 살아가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세상의 사고를 좇아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완성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악한 세상에서의 그의 삶도 세상의 마지막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있게 될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완성된 세계를 지향하는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인 세상에 집착한 삶에 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만 있을 수 있는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된 행동 몇가지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성하게 되고 낫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함을 입게 되었다는 것도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산다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루실 그 나라를 지향하는 삶이 될 것이고, 이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절처럼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내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를 발전시키고 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을 많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교회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라 이름할 수 없습니다. 즉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이 어떠한 계획으로 일하시는지도 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만유의 회복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모인 교회라면 당연히 보여져야 할 것은 세상의 마지막과 하나님이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모습 중의 하나가 2장에서 말씀드렸던,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파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네 것 내 것이 없고 단지 맡은 자로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그 모습이야말로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하지 않는 회복된 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교회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실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선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성을 위해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실 완성을 바라보고 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집착을 하고 교회를 위해서 교회로 모이고 교회가 잘됨을 소망하는 것으로 인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우리가 회개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흔히 말한 대로 우리가 열심이 없어서 교회가 부흥되지 못했음을 회개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몸의 완성을 소망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두고 회개하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앉은뱅이가 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 우리를 어디로 끌어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달성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완성까지 우리를 붙들어서 끌어갈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참된 모습은 하나님의 완성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완성된 그 나라를 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사망에 처한 세상에 대해서는 날마다 벗어나는 자로 사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21절의 말씀 중에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실 그 날까지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린 때로 이런 아쉬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하늘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시면 세상이 금방 예수님을 믿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예수님 역시 영광된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하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셔서 일하신다면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는 눈이 멀거나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구약 때 하나님이 모세를 대신 세우신 것처럼, 그리고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세상의 마지막을 외쳤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맡은 자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25절에 보면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곧 선지자의 자손입니다. 여러분을 세상에 선지자로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선지자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고, 선지자로 사는 것은 세상의 마지막과 완성될 세상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