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4:1-4 붙잡힘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기적의 사건 뒤에 따라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인기일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기적을 행한 자가 목사라면 그 교회는 몰려드는 사람들로 미어터질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염두에 두면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고, 이러한 환상을 꿈꾸며 목사로서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그러한 결과가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실제 그 일이 있었던 사도행전에서는 과연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도 각기 다른 시대에서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연 어떤 것이 복음으로 인한 진실된 결과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의도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현실이 복음의 참된 결과라면 그것으로 자금 우리의 삶이 복음을 담고 살아가는 것인지를 판단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장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의 주체자가 자신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죽였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를 성하게 하였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신 것도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임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 뒤의 결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도가 전한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4절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말하는 것을 봐도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서 남자의 수만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서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앞서 말한대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라면 그 사도의 이름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할 것입니다. 능력있고 이름있는 목사로 대우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도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믿는 자는 오천이나 되었지만 정작 말씀을 가르친 사도 자신들은 오히려 붙잡혀서 갇히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1-3절)

여기 보면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에 의해서 붙잡히고 갇히게 됩니다. 이유는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가르침이었는데 그것을 사도들이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전했던 복음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인 체제를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제거했는데 그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면 결국 자신들이 한 일이 크게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누구든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도를 가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만 해도 누구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만 해도 유대교에서 출교 해버리는 엄벌을 가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붙잡혀 갇히게 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을 싫어했고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도들을 가두는 것입니까?

당시 제사장은 유대교의 권력자로서 성전에서의 모든 예배를 집행하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종교든 종교적 의식을 주관하고 집행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종교적 권력을 지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권력이 어떠했던가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군중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하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었던 것인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도를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아무런 합법적 권한도 부여되지 않은 사도들이 군중들에게 예수님의 도를 전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맡은 자라는 것은 성전을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제사장 다음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을 포함한 사람들로서 부유하고 지체가 상당히 높은 사람들로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적 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그들의 합리주의적인 사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대한다는 것조차 헛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메시야는 단지 이상이었을 뿐이지 실제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신들에게 올 분으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사도가 가르치는 예수님의 도, 즉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헛된 도일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체제를 흔들고 허물어뜨리는 한마디로 이단적인 가르침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을 지배하던 로마와의 유대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로마와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이들은 한마디로 이 세상이 중요하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이 전부였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곧 그들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신앙체제를 모두 무너 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예수님의 선포 자체가 이 세상이 중요한게 아니라 천국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그들의 종교 체제와는 전혀 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로마와 타협하면서 잘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의 기반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고, 따라서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이유도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이라는 특정 인물로 국한 지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전부로 보고 세상에서 별 탈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가령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목사가 부흥과 성장 그리고 교회는 그저 평안하면 된다는 것을 추구하는 교회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한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일이 있게 되겠습니까? 복음은 분명 기존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교 체제를 거부할 것입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교회고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자의 의가 되기 때문에 신자가 헌금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결코 의가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전해졌을 때 분명 교회에서는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복음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면서 그러한 복음 전하는 것을 막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현세적인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교회에는 필히 싸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 앞에서 다른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우는 것이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복음이 중요한가 아니면 교회 유지가 중요한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는 개인이나 교회의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하나님이 우리 교회는 아무일 없도록 잘 지켜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붙잡히고 갇히는 사도들의 얘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갇혔지만 사도들의 가르친 말씀으로 인해서 남자만 오천명이라는 많은 수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은 결코 쇠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안위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인해서 고난에 처하고 어려움에 처한다고 해도 복음만은 결코 쇠하지 않고 그 능력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바른 태도는 복음 덕분에 자신의 안위를 꾀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만 전하면 교회가 부흥되겠지라든가 복음만 전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겠지라는 생각은 모두가 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일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산다면 평소에 복음을 말하다가도 그 복음으로 인해서 현재의 삶에 흔들림이 오고 위태로움이 올 때 현재적인 삶의 안정을 위해서 복음을 포기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삶의 형통도 있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이 살아가는 삶의 체제를 거부합니다. 그러한 복음을 전한다면 분명히 현재적인 삶의 체제에서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복음이 중요하고 천국도 소중하다고 하지만, 지금의 내 삶이 흔들리고 어려움이 오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내 교회가 아무 일 없이 잘되어지고 내 삶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굳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삶을 흔들고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이 곧 사도들을 가둔 자들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복음은 결코 우리의 삶을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