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4:5-12 베드로의 싸움

세상에서의 성공의 의미는 강한 힘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남들보다 많이 그리고 높이 존재함으로써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을 두고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성공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높은 권력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힘있는 자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떨쳐 버릴 수 없는 유혹입니다. 남에게 머리를 숙이기보다는 명령하고 군림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사는 맛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한 유혹을 가진 채 교회를 선택함으로 인해서 교회조차도 인간의 성공을 돕기 위한 교회 아닌 교회로 추락해 버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 역시 성공을 원함으로서 나타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성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교회의 성공을 많은 수의 사람이 모이고 재정이 늘어가는 것으로 단정짓는다면 과연 그러한 교회의 성공을 성경에서 인정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교회의 성공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의 사도들이 행했던 모습들을 보면서 교회다운 교회가 어떤 것이고 교회는 무엇을 고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혹 우리는 복음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교회의 성공을 원하게 되면 필히 이러한 현상이 보여지게 됩니다. 세상이 보는 교회의 성공은 말한대로 사람과 재정의 증가입니다. 큰 예배당과 교육관 등 부수적인 건물들, 이러한 것들이 성공의 증거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성공을 원할 때 결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내 교회에 붙들어 놓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불만을 가지고 떠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원합니다. 때문에 복음에 성공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잘 믿는자에 대한 복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공을 원하는 자에게 성공을 제공하면서 대신 교회에 대한 헌신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교회에 대한 헌신이 곧 예수에 대한 헌신이요 예수님은 성도의 그러한 헌신을 결코 외면치 않는다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행위에 희망을 불어 넣어줍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태들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초대 교회 때의 사도들은 결코 성공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헌신의 결과가 그냥 조용하게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세상에 떨치게 된 것도 아니고 큰 권력을 가진 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붙들려서 갇히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즉 복음은 결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때로는 복음으로 인해서 손해를 봐야 하고 고난에 빠질 수도 있음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붙들어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이 다 참예한 가운데 사도들을 심문을 하게 됩니다. 심문의 내용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8-12절)는 답을 합니다.

사실 당시 베드로가 처해있던 분위기는 상당히 고압적인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권력자들만 모인 자리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고 예수의 도를 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 앞에서 예수를 주장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베드로는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을 행했느냐고 묻는 그들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다시 일어나 섰다'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다시 사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무덤에 시체가 없는 것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서 숨겨 놓고 다시 살았다고 거짓으로 소문을 낸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을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일을 했다고 한다면 결국 예수는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분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행한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한 것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즉 성령이 충만하여 관원들과 서기관, 장로, 대제사장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령 충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성령 충만이 베드로를 둘러싸고 있는 핍박자들을 힘으로 이기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 편을 들게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바로 이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가려지는 쪽으로만 나아갑니다. 어떤 어려운 현실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령 충만이고 예수님 편을 드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린 항상 현실의 문제에서 믿음으로 굳게 서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적인 방식을 의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성령 충만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신자된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 이기는 자로 설려고 하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이기고 힘있는 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성령 충만도 남보다 더 믿음이 있는 자로 보여주기 위해서 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힘있는 자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설령 여러분이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힘있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지지 않은 자로 살아가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자로 살아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된 우리가 신자됨을 지키고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성령입니다.

신자는 어떤 상황과 어떤 현실에서도 끝까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어둠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빛이 증거되는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힘에는 힘, 이에는 이라는 정신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그 이름이 우리를 일으킴을 부인하는 자들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들은 힘과 권세를 가지고 베드로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붙드신 것을 성령이었으며 성령은 베드로로 하여금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사도로 살아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의 싸움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세상에서 신자가 신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으로 일으킴을 받은 신자에게 있어야 할 싸움인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살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신자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헛된 싸움에 우리의 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좀 더 나아지기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타락상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 있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싸움에 부지런한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세상 것을 드러냅니다. 그속에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고 사는 것이 신자이며 이 싸움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곧 승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에서 누군가가 세상 것을 자랑할 때 여러분 자신이 초라하게 보여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과연 무엇이 진심으로 초라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자로서 진심으로 초라한 것은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 버렸을 때 남은 것은 밖에 버리어져 밟히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초라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의 싸움은 세상 사람을 항복시키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만원을 자랑하면 나는 하나님에게 십만 원을 받아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잘한 것인가를 보여줌으로서 이기는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싸움은 끝까지 예수님을 붙드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의 연약함은 신자 자신에게조차 예수 그리스도가 복의 증거물로 자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신자 스스로 우습게 여김으로 인해서 증거할 것도 내놓을 것도 없는 허약한 자로서 싸움은커녕 오히려 세상과 벗된 자로 살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다시금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그리스도의 권세와 이름으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굳게 세우시고 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싸우는 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돈으로 살고 돈을 자랑할 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살고 예수의 권세를 자랑함으로써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